Experience
우연히 시작된 콘텐츠 정주행
가벼운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가 마지막 화까지 보게 된 경험이 있다. 어느 순간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어 다음 화를 기다리게 되고, 결국에는 정주행을 멈출 수 없게 되는 순간들이다. 특별한 기대 없이 시작한 이야기일수록 뜻밖의 즐거움과 몰입을 남기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를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며, 예상 밖의 정주행으로 이어지는 콘텐츠 경험을 만나보자.
그때의 내가 고른 이야기
전선영
라이브스페이스3팀 | HQ
흔히 말하는 ‘넷플릭스 기부자’에 가깝다. 구독료는 꼬박꼬박 내지만 실제로 콘텐츠를 진득이 보는 일은 드물다. 어릴 적에는 평일 저녁 10시가 되면 미니시리즈를 기다리던 드라마 마니아였지만, 바쁜 일상과 넘쳐나는 볼거리 속에서 요즘은 쇼츠나 릴스를 빠르게 넘기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 더 많아졌다. 그러던 중 최근 한 드라마를 정주행했다. 〈이 사랑 통역 되나요?〉다. 기대를 하고 본 작품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했고 해외 로케이션이 많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어문계열을 전공해서인지 다른 언어가 오가는 장면이나 낯선 풍경을 보는 걸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다. 마침 그 무렵에는 바쁜 일상 속에서 유럽 여행이 자꾸 떠오르던 시기였다. 그래서 ‘1화 정도만 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솔직히 추천할 정도로 흥미진진한 작품은 아니다. 이야기 전개는 다소 느리고 개연성이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그럼에도 계속 보게 됐다. 화면에 담긴 풍경과 분위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도시와 시골길, 낯선 장면이 아름다운 영상미로 펼쳐졌다. 쏟아지는 여행 유튜브나 예능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낭만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특히 광활한 길 위를 차 한 대가 달리고, 차 안의 두 주인공이 웃고 있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꽤 긴 장면이었고 대사도 많지 않았지만, 그 장면이 주는 여유와 편안함이 이상하게 마음을 붙잡았다.
사랑 앞에서 겁이 많은 여자 주인공의 모습도 인상 깊었다. 어딘가 현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 사랑 앞에서 과감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성격은 아니다. 특히 그 무렵 사랑에 대해 여러 생각이 많았던 시기였기에, 그녀가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더 이해하며 보게 됐다.
이 드라마를 보고 콘텐츠를 고르는 기준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는 느낄 수 있었다. 볼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는 모두가 열광하는 작품보다 그때의 나에게 맞는 이야기가 선택된다는 점이다. 당시 나는 일이 바빠 지쳐 있었고, 잠깐이라도 다른 공간을 상상하며 떠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여행과 언어 그리고 관심을 두고 있던 사랑이라는 소재가 담긴 이 드라마가 자연스럽게 와닿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가벼운 마음으로 누른 재생 버튼이었지만, 결국 끝까지 보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그 이야기가 그때의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Netflix
소프트한 도파민을 찾아서
이다은
카피라이터 | HQ
<B주류초대석〉‘명작영화 월드컵’ 편
이 콘텐츠는 캐스팅이 다했다. 프 로듀서 허키 시바세키, 드러머 김간지, 민음사 해외문학 편집자 김민경은 요즘 내 최애 조합이다. 심드렁한 불량배 두 명과 선량하지만 기개 있는 직장인 한 명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무례한 멘트를 주고받는 모습이 이렇게 조화롭고 편안하고 웃길 수가 있을까. 지금까지 나온 〈B주류초대석〉의 주제는 명작영화 월드컵, B급 영화 월드컵, 인생만화 설명회, 어둠의 독서클럽으로 사실은 꽤나 문화와 교양을 다루는 콘텐츠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심통과 조롱이 대부분이다. 진짜 너무 유치해서 약간 불량한 맛으로 웃기다. 그들은 숨김없이 찌질한 취향을 드러내고, 싫은 건 싫다고 끝까지 밀어붙인다. 마지막엔 이상하게도 그들이 지독하게 농락한 영화나 책이 궁금해진다.
사소하게는 메뉴를 고를 때나 어떤 취향을 내세워야 할 때, 나는 남들에게 맞춰주는 것이 마음이 편안한 사람이다. (뻥이다. 사 실은 조금만 친해져도 엄청나게 주장한다.) 그래서 선명하게 자신의 취향만이 옳다고 꺼드럭거리고, 남의 취향에 거침없이 야유를 보내는 솔직한 토크에 해방감과 매력을 느낀다. 솔직한 이야기가 재미없기란 쉽지 않으니까. 한 시간 넘는 콘텐츠에 시간과 집중력을 쓰지만, 어떤 지식이나 정보가 남지 않아도 괜찮다. 웃음이 내 교양이다. 잘 웃었으면 그만이다.

B주류초대석 ‘명작영화 월드컵’ 편

〈72시간 소개팅〉 '타이완' 편 - ‘차은우육면’ 별명 탄생 장면
〈72시간 소개팅〉‘타이완’ 편
어? 저 남자가 원래 저렇게 귀여웠나? 〈72시간 소개팅〉 ‘타이완’ 편에 나오는 세준 씨는 오래전 〈솔로지옥〉에 출연한 인물이다. 그때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출연자였는데, 이번에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조잘조잘 그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일까.
〈72시간 소개팅〉은 낯선 남녀가 3일 동안 함께 여행하며 서로를 알아가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몸매를 부각하는 게임도 없고, 다른 출연자와 경쟁 구도에 놓이는 일도 없다. 그저 처음 만난 남녀가 낯선 여행지에서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고, 함께 밥을 먹고, 거리를 함께 걷는 심심한 장면이 이어진다.
그러나 72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쌓여 갈수록, 그 사이에 생겨나는 서사는 보는 사람을 간지럽힌다. 세진 씨가 땀 흘리는 세준 씨에게 ‘차은우육면’이란 별명을 붙여주는 장면은 내가 가장 귀여워하는 장면이다. 러닝타임이 한 시간이 훌쩍 넘는데도, 이럴 수가. 끝까지 볼 수밖에 없었다. 다 보고 여운이 가시지 않았을 때, 과몰입한 사람들의 주접 댓글을 보는 재미 또한 놓칠 수 없는 부록이다.
고개만 돌려도 짧고 빠르고 자극적인 도파민을 만날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대단한 도파민보다 영양가 없고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더 두근거리게 다가온다. 조금은 느린 호흡, 느슨한 앵글, 잔잔한 선곡, 싱거운 농담을 주고받는 두 남녀. 72시간의 이야기를 가장 섬세하게 배치하는 〈원의 독백〉 임승원의 연출까지. 새로운 연애 프로그램의 발견이었다. 하루의 긴장감을 다 내려놓고 침대에 누워 말랑하게 보기 좋은 콘텐츠에 점점 더 마음을 주게 된다. 곧 시즌2가 시작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껴서 볼 생각이다.
시선을 강탈하는 이야기
존 레이스크
그룹 어카운트 디렉터 | INNOCEAN UK
나는 신작 드라마를 쉽게 시작하지 못하는 편이다. 익숙한 드라마를 반복해 보며 느끼는 편안함이 더 크다 보니, 새로 방영되는 작품은 늘 뒤늦게 알게 된다. 흠뻑 빠져들 만한 신작을 찾기보다는 멍하니 스마트폰을 스크롤하며 드라마〈오피스〉를 수십 번씩 돌려보는 게 더 좋다. 온 신경을 쏟기보다는 배경처럼 편안하게 쉬어가며 보는 드라마를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런 성향 탓에 지난 10여년 간의 화제작 중 꽤 많은 작품을 놓쳤다. 〈왕좌의 게임〉과 〈기묘한 이야기〉는 여러 시즌이 방영된 뒤 작품성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 안도감을 얻을 스포일러를 찾아본 후 바짝 집중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이 생긴 뒤에야 보기 시작했을 정도이다. 장르는 달라도 이런 익숙함과 편안함은 늘 내가 느끼는 ‘몰입’의 중심에 있었다. 그래서 모국어인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전개되는 드라마는 좀처럼 마음이 가지 않았다. 외국어로 이야기를 따라가려면 긴장이 생기고, 그러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집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선이 스마트폰에 잠시라도 머물면 자막을 읽기도 쉽지 않다. 어릴 적 아버지가 자막이 달린 북유럽 범죄 드라마물을 즐겨 보셨지만 당시에는 그 취향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몇 년 전, 룸메이트가 영어 더빙으로 보고 있던 스페인 드라마 〈종이의 집〉을 우연히 보게 됐다. 이미 몇 화가 지난 상태였지만, 그 장면을 보던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눈길이 갔다. 더빙은 어딘가 어색했고 분위기는 다소 과장된 느낌이 있었지만, 몇 화 를 놓쳐 중요한 몇 가지를 알지 못했는데도 인물과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었다. 결국 나는 룸메이트가 없어도 드라마를 계속 챙겨보게 되었고, 어느 순간 스페인어 음성에 영어 자막을 켜고 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함께 보던 중 그가 내용을 따라잡기 위해 되돌려 보는 일도 전혀 개의치 않게 되었다.
드라마 속 다소 과장된 반항의 서사는 내가 이전까지 편안하게 여겨 보곤 했던 콘텐츠와 대비되었다. 서사 자체가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중간에 수시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계속 나오다 보니 마음 가벼이 보다 안 보기를 반복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일주일 만에 시즌1과 2를 모두 봐 버리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나를 붙잡았던 것은 주인공을 마음껏 응원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다소 허술하게 동기 부여된 인물들조차 말이다. 이들이 잘 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드라마를 반복 시청하며 얻는 위안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큰 노력 없이도 몰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내가 알고 있던 스페인어는 고작 세 단어 정도였는데도, 그 이야기에 집중하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 았다는 사실이다. 그 후, 나는 ‘외국어’로 방영되는 영화나 드라마에도 마음을 열게 되었다. 여전히 겨울이면 〈오피스〉를 다시 보지만, 이제는 플롯이 복잡하더라도 응원하고 싶은 인물이 있는 드라마에 더욱 열린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더 이상 정해둔 방식대로 콘텐츠를 소비하지 않는다. 결국 내가 계속 보게 될지는 첫 회에서 결정된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집중력이 그다지 좋아진 것 같진 않지만, 몰입에 대한 거부감은 사라졌다. 어쩌면 이제야 북유럽 드라마를 좋아하던 아버지를 이해하고 따라가는 듯하다.

ⓒNetflix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