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eas
연출을 비운 자리에 채워진
‘진정성의 기술’

이지원 PD
이지원 PD는 2007년부터 15년간〈다큐멘터리 3일〉과 함께했다. 화려한 연출이나 짜인 서사 대신 카메라 하나로 수백 개의 공간과 수천 명의 사람 곁에 머물며 이야기를 건져 올렸다. 2022년 프로그램은 종영했지만, 지난해 그가 SNS에 올린 글 하나가 30만 명의 마음을 움직였다. 2015년 안동역에서 만난 대학생들과의 약속, 10년 만의 재회였다. 그 반향은〈다큐멘터리 3일〉의 귀환으로 이어졌다. 다시 72시간의 여정을 시작한 그에게 이야기를 찾는 법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물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무조건 이야기는 있다는 걸, 이제는 확신해요.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Q. 《LIFE IS ORANGE》독자분들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보통은 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을 잘 모르시죠. 진짜 팬분들만 제 목소리를 기억해 주시곤 하는데요. 저는〈다큐멘터리 3일〉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종영할 때까지 15년간 함께한 이지원 PD입니다.
Q. 15년이라는 시간이 참 길어요. 요즘은 1인 크리에이터가 익숙하지만, VJ라는 직업이 생소하던 시절부터 이 일을 하셨잖아요.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나요?
전공이 방송연예과예요. 처음엔 카메라 앞에 서보기도 했는데 제 안의 것들이 잘 표현되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친구들을 찍어주기 시작했는데 그게 참 재밌었죠. 그걸 계기로 무작정 프로덕션에 들어가 연출 막내 생활을 2년 정도 했어요. 그러다 작은 카메라를하나 사서 “선배님, 저도 한번 해보겠습니다.”라고 손을 들었죠.〈세상 속으로〉같은 프로그램부터 시작해 여러 방송을 거치다가〈다큐멘터리 3일〉이 생길 때 합류 제안을 받아 시작하게 됐어요.
Q. 〈다큐멘터리 3일〉은 정해진 시간, 정해진 공간 안에서 이야기를 찾아내야 하잖아요. 제작자로서 그 공간이 가진 힘은 뭐라고 보나요?
사실 제한된 시간과 장소 때문에 초창기엔 두려움이 컸어요.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공간 자체가 가진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작진이 주도해서 뭔가를 애써 만들어내거나 쫓아다니지 않아도, 공간 안에 사람이 들어오고 상황이 생겼다 빠져나가는 그 찰나를 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든요. 일반 방송에서 보기 힘든 ‘여백’이 주는 힘이에요. 1년쯤 지나고 나니 확신이 생겼어요.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무조건 이야기는 있다는 걸요.
Q. 공간과 사람 사이의 여백, 바로 그게 〈다큐멘터리 3일〉만의 힘인 거네요. 그렇다면 수많은 장소 후보지 중에서 한 곳을 고르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저는 프리랜서라 인하우스 PD와 작가진이 결정하고 의견을 물어보는 구조예요. 가장 중요한 건 공간 자체인데, 그 안의 사람들을 관찰했을 때 이야깃거리가 나올지 가늠해 보는 거죠. 제 경험상 웬만한 곳에선 다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주로 그 시점에 이슈가 되는 큼직한 공간들을 위주로 살피는 편이에요.


Q. 장소가 정해지고 현장에 도착하면 어떤 장면은 따라가고 어떤 장면은 흘려보낼지 판단해야 할 텐데, 기준은 어떻게 세우나요?
보통 3명에서 5명의 감독이 투입되는데, 각자 찍은 결과물을 모은 뒤 추려내는 방식이라 보이지 않는 경쟁이 치열해요. 각자 자신의 방송 분량이 확보되어야 하니까요. 저는 일단 가만히 지켜봅니다. 이제는 거의 관상쟁이가 다 된 기분인데, 대화가 잘 풀릴 것 같은 분께 다가가 10분 정도 말을 섞어보면 느낌이 와요. “안녕하세요, 어디 가세요?”라는 첫마디에 바쁜 분들은 지나치시지만 여유롭게 웃어주는 분들은 마음의 문이 열려 있죠. 화술이 좋은 분도 좋지만, 말수가 적어도 진중한 캐릭터가 느껴지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캐릭터가 보이면 끝까지 따라가는 거죠.
Q. 그렇게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모여 한 편의 이야기가 되는 건데, 그 흐름이 치밀한 설계에서 나온다고 보나요, 아니면 현장의 우연에 가깝다고 보나요?
사전 회의 단계에서는 “이 공간에 가면 이런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과 바람 정도만 나눠요. 실제 현장에서 만나는 장면은 전부 우연의 산물이죠. 어떤 분을 찍다 보면 그분이 “저기 가면 더 영화 같은 사연이 있다.”며 다른 분을 소개해 주는 식이죠. 우연에 우연이 겹치는 거예요. 미리 사연 있는 분을 섭외하면 날것의 재미가 사라지잖아요. 우리가 만난 대부분의 이야기는 진짜 우연히 스쳐 지나가던 사람들의 기록이에요.
Q. 모든 이야기는 결국 사람한테서 나오는 셈이네요. 시청자가 그저 관찰자로 머물지 않고 어느새 출연자의 삶에 자신을 투영하며 몰입하게 되잖아요. 그 공감의 힘은 어디서 온다고 보는지 궁금해요.
결국 ‘내 이야기’이기 때문 아닐까요. 조선소 편을 방송하면 조선소 노동자들이 볼 수밖에 없고, 스포츠 선수가 나오면 비슷한 꿈을 꾸는 이들이 몰입하게 되죠. 연예인의 삶은 화려하지만, 평범한 이웃이 그 공간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볼 기회가 드물잖아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출연자분들이 본인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촬영에 임한다는 점이에요. 스스로를 사회의 작은 부품이라 여기며 살던 분들에게 카메라를 들고 다가가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고 요청하는 순간, 그분들의 인생이 비로소 주인공이 되는 거잖아요. 시청자 역시 그분들을 배경이 아닌 삶의 주인공으로 바라보게 되는 거죠.
Q. 그런 순간을 만들려면 결국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게 먼저겠네요. 한 인터뷰에서 “착한 척을 잘해야 한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
사람 섭외가 매번 어려워요. 제 첫인상이 부드러운 편은 아니어서 카메라를 들고 다가가면 일단 긴장하세요. 그래서 항상 착한 척을 하면서 “아이고, 안녕하세요~” 하고 다가가는 거예요. 초창기엔 거절당하는 게 일이었는데,〈다큐멘터리 3일〉이 유명해지며 달라졌어요. 이제는 프로그램 이름을 대면 본인 이야기를 털어놓을 준비가 된 분들도 많아졌거든요. 착한 척의 본질은 결국 고압적인 태도를 내려놓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대하는 거예요. 그게 득이 된다는 걸 알기에 오늘도 열심히 착한 척을 합니다.
이야기가 머무는 곳
Q. 〈다큐멘터리 3일〉이 종영 후, 잠시 멈췄던 시간을 지나 새로운 시즌으로 돌아온다고요. 이번 시즌은 어떻게 준비되고 있나요?
4월 6일 첫 방송 아이템이 273 청춘버스예요. 대학생 승객들을 만날 예정이죠. 이번엔 시즌제로 약 24회 정도 예정하고 있어요. 지난 시즌과 차별화된 점이 있냐고 물으신다면 없다고 답하고 싶어요. 예전 모습 그대로 돌아옵니다. 좋게 말하면 초심을 잃지 않은것이고,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믿는 거죠. 단지 시대가 흐른 만큼 담기는 이야기가 달라졌을 뿐, 저희의 태도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Q. 초심 이야기를 들으니 더 궁금해졌어요. 모든 것이 빠르게 소비되는 지금 이 시대에,〈다큐멘터리 3일〉이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종영할 무렵엔 이 프로그램의 존재를 아는 분이 그리 많지 않았어요. 그런데 안동역 에피소드가 화제가 되면서, 많은 분이 과거의 추억을 다시 꺼내어 주셨죠. 그 따뜻한 성원 덕분에 다시 시작하게 된 셈이에요. 지금은 아날로그의 가치가 점차 소멸해 가는시대잖아요. 저희는 그걸 기록하는 아카이브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AI 시대라고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은 이야기는 AI가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말을 들었어요. 지난 15년 동안 사라져가는 마을의 마지막 사흘을 기록하고, 그 동네를 지키던 이들의마지막 목소리를 남겼던 것들이 이제는 거대한 역사적 사료가 되었죠.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전 모습을 우리 프로그램에서만 볼 수 있다며 고마워하시는 분들을 뵐 때면, 누군가의 추억과 기억을 지키는 이 일의 무게를 다시금 느껴요.
Q. 그런 순간들을 기록하다 보면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일도 많이 겪으셨을 것 같아요.
늘 감동만 있는 건 아니에요. 물리적으로 위험한 순간도 꽤 많아요. 포장마차 편을 찍으면 취객이 많잖아요. 완전히 을의 입장이다 보니 시비가 붙어도 묵묵히 넘겨야 할 때가 많아요. 예전엔 낯선 집을 방문해도 따뜻하게 맞아주셨는데, 이제는 집 안에는 거의 안들어가려고 해요. 시대가 바뀐 거죠.
Q. 그런 예상 밖의 순간들 사이에서,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개인적으로는 홍대에서 찍은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아요. 거리에서 버스킹하던 청년을 거의 주인공급으로 찍었는데, 나중에 TV를 보다 보니〈슈퍼스타 K〉에 나오고 있더라고요. 장범준씨였어요. 그가 유명해지면서 “〈다큐멘터리 3일〉에 나왔던 사람이다.” 라는 짤이 다시 돌기도 했죠. 오랜 시간 찍다 보니 지금 방송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그 짧은 장면 안에 꽤 있어요. 그 장면들을 다시 찾아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Q. 에피소드 이야기가 나왔으니, 화제의 안동역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네요. 혹시 모르시는 독자분들을 위해 어떤 에피소드였는지 설명해 주세요.
11년 전, 2015년 8월에 ‘내일로 기차 여행’ 편을 촬영하던 중이었어요. 마지막 날 만난 두 대학생과 인터뷰를 했는데, “우리 10년 후에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라는 얘기가 나왔어요. 한 친구가 “그때도 다큐 찍으러 오실 거죠?”라고 묻길래, 저는 “그때도 제가 이 일을 하고 있을까요?” 라고 답했죠. 불확실한 미래를 담은 기약 없는 약속이 제 마음속에 부채처럼 남아 있었어요. 안동역 근처를 지날 때마다 그 생각이 나서 개인 SNS에 짧게 올렸는데, 하룻밤 새 30만 명이 넘는 분들이 지켜보는 ‘전 국민적 약속’이 되어버렸어요. 당시 제 팔로워가 200명이었는데요(웃음). 아마도 다들 ‘약속’이라는 가치에 목말라 있던 게 아닌가 싶어요.
Q. 그 자리에서 나눈 첫마디가 “잘 살았어요, 잘 살아줘서 고마워요.”였다고요. 거창한 말도 아닌데 많은 사람이 울컥하셨잖아요. 왜 그 말이 그렇게 큰 울림을 줬다고 생각하나요?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조차 때로는 버겁잖아요. 예기치 못한 좌절과 부딪히기도 하고요. 그런 험난한 세월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텨 10년 전 그 자리에 다시 서준 친구들이 너무나 고마웠어요. 잘 살아남아 주었기에 우리가 재회하게 되었으니까요. 다들 각자 멋지게 살아줬거든요. 그 장면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보며 느꼈어요. 우리 모두가 ‘잘 살아왔다’는 그 한마디 위로에 목말라 있던 건 아닐까 하고요. 평범하게 사는 것도 대단한 거라는 걸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Q.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낭만’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는데, 마침 PD님 별명이 ‘낭만 VJ’잖아요. PD님에게 낭만은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직접 붙인 별명이에요(웃음). 낭만은 사실 가장 힘들 때 필요한 거 같아요. 평탄한 일상에선 낭만 없이도 잘 살죠. 하지만 삶이 무너질 것 같을 때 저 멀리 희미한 낭만 하나만 보여도 그걸 이정표 삼아 다시 걸어갈 수 있거든요. ‘저기까지만 가면 내 낭만이 있다’는 믿음이, 견디는 힘이 되어주는 거죠. 누군가는 그걸 목표라고도 하겠죠. 다른 사람들이 놀릴 때도 있지만, 모두 가슴속에 낭만 하나쯤은 품고 사시면 좋겠어요.
Q. 그럼 PD님은 그 낭만에 기댄 순간이 있었나요?
사실 제 인생이 그렇게 힘든 인생이 아니어서요(웃음). 돌아보면 고난이 없었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 눈에는 힘들어 보이는 순간도 있었겠지만, 저는 그걸 크게 데미지로 받아들이지 않는 성격이더라고요. 그냥 수평적으로 쭉, 저기 낭만 하나 또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가는 거죠.
Q. 한 시절을 관통하는 기록자로 살아오며, 카메라 뒤에서 제작자로서 반드시 지키려 했던 태도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꾸미지 말자, 있는 그대로. 그리고 어떤 직업이든 어떤 위치에 있는 분이든 똑같은 태도로 대하자.’가 원칙이에요. 재벌을 만나든 길 위에서 폐지를 줍는 어르신을 만나든 똑같이 당당하고 정중하게 대하는 거죠. 또 하나는 ‘의도적으로 연출하지 말자.’예요. 아픈 사연을 가진 분들이라고 해서 더 안타깝게 그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마지막은 ‘진실성’이에요.〈다큐멘터리 3일〉은 사흘간의 기록을 시간 순서대로 편집해 내보내는데, 15년간 단 한 번도 그 원칙을 어긴 적이 없어요.
Q. 말씀하신 원칙들이 결국〈다큐멘터리 3일〉이 담아온 이야기의 온도를 만든 것 같네요. PD님이 생각하는 ‘좋은 이야기’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저는 가공되지 않은 심심한 이야기를 좋아해요. 굴곡 있는 인생이 아니어도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 듣는 게 좋아요. 당장 재미가 없어도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 그리고 그 슴슴한 일상 속에서 툭 튀어나오는 의외의 한마디가 진짜 힘을 발휘하거든요. 거친 손으로 시 한 구절을 읊었던 어부 아저씨 같은 순간이요. 그 한마디가 빛나려면 나머지가 담백하게 받쳐줘야 해요. 보는 이마다 마음이 머무는 지점은 다르겠지만, 각자의 가슴에 무언가 맺히게 하는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라고 믿습니다.
Q. 그런 이야기를 직접 기획해서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있나요? 개인적으로 언젠가 꼭 만들어 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요?
일반인분들의 자서전을 영상으로 담고 싶어요. 거창한 분들이 아니어도 돼요. 퇴직하는 소방관처럼 평범하지만 위대했던 인생들을 인터뷰로라도 한번 정리해 드리고 싶거든요. CG를 쓰거나 큰 예산을 들이진 못해도, 각계각층 사람들 이야기를 쭉 모아서 아카이브처럼 고이고이 남겨두고 싶어요.
Q. 마지막으로, 일상에서 ‘진짜 이야기’를 발견하려면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좋을까요?
많이 들어야 해요. 제가 하는 말은 방송에서 아무 쓸모가 없어요. 상대방 말을 들어야 그 사람 캐릭터도 나오고 진한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리고 연륜이 쌓일수록 말을 아껴야 해요. 스스로 꼰대가 아니라고 생각해도 일단 말은 줄이고 귀 기울여 듣는 편이 나아요. 이야기는 결국 상대한테 있으니까요. 적게 말하고, 많이 듣기.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