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s
Own Way
각자의 길 위에서
매일 같은 출퇴근길,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 그리고 지내던 곳에서 떠나는 일. 우리 주변에선 크고 작은 이동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 안에서도 유독 오랫동안 기억에 맴도는 장면과 감각이 있다. 어떤 이동의 순간이 자리 잡고 있는지, 세 이노시안에게 물었다.
강북과 강남 사이, 찰나의 순간
오은하
아트디렉터 | INNOCEAN
나의 집은 용산구에 있다. 학교 앞 하숙집을 시작으로 서울살이 터전이 된 용산구는 한강 북쪽에 위치해있다. 서울의 중심 지역답게 동서남북 모두 부담 없이 이동할 수 있지만, 유독 나의 이동을 설레게 하는 방향이 있다. 바로 회사가 위치한 강남이다. 그중에서도 버스로 한강 위 한남대교를 달리는 1분, 딱 그 순간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물을 좋아했다. 바다 vs 산을 묻는다면 지체 없이 바다를 말하고, 강가나 개울 근처에선 몇 시간이고 눌러앉아 물멍을 때린다. 그래서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도 한강이다. 첫 동아리 아웃팅, 벚꽃 구경 등 20대 초반엔 한강 안에서 추억을 쌓았다면, 퇴근 후 집 가기 바쁜 직장인이 된 지금은 한강을 멀리서 바라보며 또 다른 추억을 쌓고 있다. 한강 위를 달릴 때의 풍경과 이미지는 항상 새로운 느낌을 주는데, 나는 이 기분을 더 잘 느낄 수 있게끔 ‘한강 위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퇴근길의 잔잔한 밴드 음악이나, 출근길 전투력을 상승시켜주는 팝 록 음악은 이 짧은 이동을 더욱 짜릿하고 풍요롭게 해준다.
이렇게 눈과 귀를 호강하며 바라보는 한강은 내가 무엇을 타고 이동하는지에 따라서도 다른 매력을 지닌다. 버스를 타고 지날 땐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바깥을 지긋이 바라본다.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날 기쁘거나 후회되는 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버스 속 한강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인 것이다. 지하철 속 한강은 주변을 관찰하는 시간이다. 긴 터널을 빠져나와 쏟아지는 햇빛에 고개를 들면, 주변 사람들 모두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각자 생각은 달라도, 함께 한강을 두 눈으로 담고 있는 순간만큼은 한강이 잠시나마 모두에게 무언의 응원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자가용을 타고 이동하는 한강은 휴식의 공간이다. 창문을 열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맞으면 묵혀두었던 감정들이 날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늑한 차 안에서 차가운 한강의 공기로 머리를 식히는 1분의 시간이 나에게는 가장 편안한 이동의 순간인 것이다.
이렇듯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이동하는 순간은 나에게 큰 의미가 담겨있다. 앞으로 몇 년을 더 서울살이를 이어 나갈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나는 이 1분에 큰 위안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퇴근길에도 나는 다시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한다. 요즘은 해가 살짝 길어져 퇴근길에 노을을 볼 수 없어 아쉽지만, 아무렴 어떠랴. 오늘은 Nothing But Thieves의 ‘Soda’를 들으면서 다리를 건너야지.
차를 살 결심
원세희
카피라이터 | INNOCEAN
그 순간은 갑자기 찾아왔다. 차가 없으면 다니지 못한다는 캘리포니아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도, 영하 15도에 20분 넘게 버스를 기다리고, 한여름엔 버스를 놓쳐 불타는 자전거 안장에 엉덩이도 제대로 못 댄 채 지하철역까지 가고, 차 광고를 만드느라 신차의 면면을 낱낱이 살펴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갑자기, ‘나도 내 차를 가져야겠어’ 하고 결심이 선 순간.
10여 년 동안 잠들어 있던 면허증을 꺼내고, 도로 연수를 받고, CD님께서 소개해 주신 딜러와 얼굴 한 번 직접 보지 않고 문자로만 이야기 하면서 그렇게 내 차와 나는 어색하게 만났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고, 출퇴근용도 아니고, 정말 갑자기 이유 없는 결심 때문에 차를 사게 된 나는 한동안 차를 주차장에 세워 두고 왔다 갔다 보기만 했다. 갑자기 새벽에 나와서 물티슈로 차를 닦아도 보고, 몰고 갈 데도 없으면서 차에 앉아 괜히 음악이나 연결해서 들어보고…. 사람들이 말하던 나만의 다른 세상이 생긴 게 이런 기분인가? 신기하고 낯설고 쑥스러워서 이상 행동들을 하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또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집 앞만 돌아다니던 나는 큰맘 먹고 회사까지 차를 몰고 가기로 했다. 아무 도움 없이 나 혼자 서울을 가는 건 처음이었다. 아침 일찍 사이드 미러와 좌석을 몇 번이나 고쳤는지 모른다. 나와 내 차가 처음으로 서울까지 합을 맞춰보는 긴장되는 순간. 다리에 계속 쥐가 나는 느낌이 들었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천천히 하이패스를 통과하고, 고속도로를 타고, 빠지라는 데서 빠지고…. 여러 대의 차 사이에서 초보티 안 내며 도로를 달리다가 뱅뱅사거리에 도착했을 땐 뿌듯함에 못 이겨 당시 유행하던 노래 ‘Hey Mama’의 볼륨을 최대로 키웠다. ‘운전 이거 별거 아니네. 드디어 나도 차를 가지고 회사에 오는 어른이 되었다!’
미리 예약해 둔 회사 맞은편 주차장에 차를 잘 대기만 하면 내 차로 서울 출근하기 미션 성공하기 일보 직전. 조심조심 주차장에 들어섰고 운 좋게 한 자리가 바로 보이길래 주차를 하려는데, 이 이른 아침에 다른 차들이 바로 따라오고 있었다. 평소에도 공간지각 능력이 제로에 수렴하는 나는 주차에 큰 불안감을 갖고 있었고, 누가 뒤에 없으면 왔다 갔다 열 번 정도 하면서 주차를 할 수 있는데(지금은 세 번 정도로 줆) 뒤에 바로 다른 차가 오는 바람에 큰 부담감을 느끼고 급하게 주차하려다 멀쩡히 주차되어 있던 외제 차를 박아버렸다. ‘아, 안 돼…’ 빵빵대는 뒤 차들의 소리에 맞춰 볼륨을 키웠던 노래가 이른 아침 주차장에 울려 퍼졌다.
지금은 강원도도 여러 번 가고, 촬영장도 가고, 친구 집도 가는 꽤 노련한 드라이버가 되었다. 하지만 비가 오면 무릎이 시리듯 겨울만 되면 내 차로 처음 출근하던 겨울날의 복잡 미묘하던 그 감성이, 이상하리만큼 갑자기 찾아왔던 차를 사겠다던 그 꼿꼿하던 결심이 꼭 한 번씩 생각이 난다.
설레는 길
이현주
캠페인플래너 | INNOCEAN
나는 해외여행을 좋아한다. 한국에서 잠깐 떠나 있다가 돌아온다는 것과, 또 아예 다른 문화권에서 놀다 온다는 게 재밌어서 좋다. 한 번 갔다 오면 다음 여행을 바라보면서 사는 종류의 사람에다, 같은 나라나 같은 지역에 여러 번 가는 것도 좋아하고, 짧은 여행도 긴 여행도 좋아해서 어떻게든 시간을 내 1년에 최소 두세 번은 놀러 다녔는데, 코로나 때문에 뚝 끊겨버렸다.
계획하던 단기 여행, 장기 여행 모두 취소되고 해외를 못 가게 되니 하나 깨달았다. 내가 해외여행 가서 노는 걸 좋아하는 만큼 해외로 나가기 직전까지의 그 설렘을 무척이나 즐거워했다는 것. 아침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네 시 반에 공항버스 타러 나가고, 공항버스에서 두 시간 졸다 보면 공항에 도착하고, 공항에서는 면세품이니 뭐니 바쁘게 뛰어다니다가 커피 한 잔 마시고 비행기에 타는 그 순간까지. 오죽했으면 그냥 새벽에 공항 갔다 올까 고민했을 정도로,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그리고 작년 말, 근 3년 만에 드디어! 가족 여행을 해외로 다녀왔다. 아침 비행기 타겠다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차 타고 한산한 새벽 도로를 달리는데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내비게이션을 잘못 봐서 고속도로에서 잘못 빠졌던 것도, 공항에서 늦을까 봐 역할 분담하고 서로 허겁지겁 뛰어다니던 것도 모두 설렘의 연속이라서 다음 여행까지 살아갈 에너지가 잔뜩 충전됐다. 물론 3개월 안에 소진될 테지만 그건 다음 여행을 바라보면서 살면 되니까 괜찮을 거다. 아마도. 귀국하자마자 취소되었던 장기 여행 계획을 다시 불러왔다. 아직도 코로나 때문에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올해 안에 꼭 또 다른 설렘을 느낄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