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ommunity Of Taste
나노사회, 취향으로 뭉치다
최지혜 |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
서울대학교 소비자학 석·박사
소속보다 선호가 중요해지는 시대
서로 다른 콘텐츠를 보는 시대다. 같은 나이, 같은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도 각자 구독하는 OTT 서비스가 다르고 듣는 음악이 다르다. 한 세대여도 접하는 콘텐츠가 다양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나노사회’라고 한다. 사회가 공동체적 유대를 유지하지 못하고 유기체의 기본 단위인 분자 혹은 원자, 즉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쪼개졌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나노사회의 등장으로 우리 삶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우선 관심사나 취향별로 구분짓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가장 극명하게 취향이 분화되는 분야는 음식이다. 민트초코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두고 ‘민초단-반민초단’, 물렁한 복숭아를 좋아하는지 딱딱한 복숭아를 좋아하는지를 두고 ‘물복-딱복’ 등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레이블링한다. 이러한 현상은 소속보다 선호가 중요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다시 말해서 전통 사회의 개인은 자신이 속한 준거집단 내에서 정체성을 찾았지만, 나노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내면지향적인 취향을 기준으로 바뀌고 있다. 전통적 ‘우리 의식’이 흐려진 자리에 자신의 다양한 취향 위주로 트렌드가 재구성되면서, 혈연·지연·학연의 힘이 약해진다.
분화된 관심사는 깊어진다. 에스프레소 유행이 대표적이다. 코코아 파우더가 올라간 나폴리식 ‘에스프레소 스트라파차토’, 우유 거품을 올린 ‘에스프레소 마키아토’ 등 커피를 얼마나 복잡하게 즐기느냐가 취향의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 커피뿐만이 아니다. 최근 유행하는 원 푸드 그로서리(One food grocery)도 예시가 된다. 원 푸드 그로서리는 단일 식재료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식료품점으로, 식재료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동시에 쌓을 수 있는 공간이다. 특정 분야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디깅 소비’가 나타나면서 그동안 들어보지 못한 낯선 식재료나 식문화를 즐기는 마니아적 취향이 힙한 문화로 떠올랐다.
나노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내면지향적인 취향을 기준으로 바뀌고 있다.
태그니티 관계의 형성
나노사회의 마지막 양상은 좁고 깊게 탐닉한 관심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관계의 형성이다. 바로 ‘태그니티’의 탄생이다. 태그니티란 자신이 선호하는 제품이나 서비스, 혹은 자신의 관심사를 태그(Tag)로 표현하고 태그에 기반해 커뮤니티를 형성한다는 뜻이다.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SNS의 영향력이 부상하면서 생겨난 새로운 개념의 공동체다. 태그니티 문화의 확산을 짐작하게 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오픈채팅 시장의 성장이다. 오픈채팅은 서로 모르지만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끼리 ‘친구 추가’ 절차 없이 카톡방을 만들 수 있는 기능을 뜻하는데, 카카오 발표에 따르면 2022년 오픈채팅 사용자 수는 2019년 대비 약 76% 증가해 전체 대화량의 약 40%를 차지했다.¹
오프라인 모임에서도 관심사를 중심으로 한 태그니티가 핵심 키워드로 자리 잡고 있다. 동네 지인들을 불러 모아 조기축구회를 즐기던 부모님 세대와 달리, 요즘 세대는 등산·스노클·전시·공연 등 관심 있는 주제를 중심으로 모임이 만들어진다. 프립(Frip)은 호스트(주최자)가 색다른 주제로 모임을 만들면, 게스트(참가자)가 참여비를 내고 해당 활동에 참여하는 소셜 액티비티 플랫폼이다.² ‘코딩 배우기’ 같은 학습 활동부터 ‘음악 들으며 등산하기’, ‘한양도성 산책하기’ 같은 취미 활동까지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든다. 기업들도 관심사를 기반으로 한 작은 단위의 커뮤니티에 주목하는 추세다. 2021년 4월 왓챠는 ‘왓챠파티’라는 모바일 베타 서비스를 시작했다. 왓챠파티는 최대 2천 명이 동시 접속해 같은 콘텐츠를 함께 감상하며 채팅할 수 있는 왓챠의 기능이다. 왓챠파티가 흥미로운 이유는 왓챠가 취향 맞춤 콘텐츠 추천을 기반으로 성장한 OTT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에 기반한 개별 시청 문화가 놓치고 있던 소통의 즐거움을 겨냥한 셈이다. 왓챠의 사례는 나노사회에서 기업들이 어떻게 소비자와 소통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다. 앞서 서술했듯 나노사회에서는 개인이 다양한 정체성으로 분화한다. 하지만 인간의 본능적인 소통과 관계 맺기의 욕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업들은 자사 브랜드가 개별 소비자들이 서로 취향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구심점이 되도록 해야 한다. 브랜드가 놀이터가 되면 소비자의 관심이 상품과 서비스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1. 〈카카오 CEO도 놀랐다…카톡 오픈채팅 사용자 76% 쑥〉, 《매일경제》, 2022. 07. 26.
2. 〈Z세대의 스마트폰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시사IN》, 2022. 08. 29.
나노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
이처럼 사람들이 관심사별로 쪼개지고 깊어지고 모이는 현상은 향후 더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속도 또한 빨라질 것이다. 점점 더 고도화되는 추천 알고리즘의 발달이 우리를 세분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노사회가 진행됨에 따라 선행되어야 할 것은 역시 공감력을 기르는 일이다. 내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집단에 대해 무조건 그르다고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우연한 발견(Serendipity)’의 재미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AI와 빅데이터를 동원한 막강한 추천 기능은 우리를 알고리즘의 반향실 안에 가두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시대에 자기도 몰랐던 새로운 선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인위적으로라도 자기 취향을 무작위로 섞을 필요가 있다.
이처럼 ‘일정 기간 동안 유지되는 다수의 동조’라고 정의할 수 있는 트렌드의 근본적인 양상이 변하고 있다. 이제 트렌드는 모두가 함께 공동으로 느끼는 커다란 흐름이 아니라, 작은 지류들처럼 소수의 단위에서 갈라지고 모였다가 다시 퍼지는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자신이 소속된 준거집단 위주로 형성되던 전통적 우리 의식이 취향 위주로 재편되고 있다. 나노사회에서 세밀하고 다양하게 빨라지는 트렌드에 대응해야 할 트렌드 리터러시가 필요한 시점이다.
세밀하고 다양하게 빨라지는 트렌드에 대응해야 할 트렌드 리터러시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