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유스 컬처를 말할 때 필요한 것들
정지돈 Jung, Jidon│작가 Writer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2015년 <젊은작가상>, 2016년 <문지문학상>을 수상하며 발표작마다 평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소설집으로는 <내가 싸우듯이>,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가 있다.
우리가 유스 컬처 Youth Culture를 이야기할 때 필요한 건 실패를 사유하는 태도다. 과거의 유스 컬처를 언급하며 이런 게 잘됐고, 이렇게 영향을 끼쳤다고 성공 사례를 언급하는 게 아니라 실패를 말하는 것. 그리고 그 실패가 가능할 수 있었던 사회의 맥락을 사유하는 것. 그러지 않고 유스 컬처를 호명하는 것은 착취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유스 컬처 논증
유스 컬처는 모순적이다. 기성 체제에 저항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기성에 편입되고 메이저가 된다. 이러한 연쇄에서 벗어나는 청년 문화는 없다. 가끔 그 저항의 강도나 표현 수위가 지나쳐 연쇄에 흡수되지 않는 청년 문화는 잊혀진다.
질문은 청년 문화가 이러한 모순,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연쇄 속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러한 연쇄를 당연한 것으로 심지어 목적으로 받아들일 때 생긴다.
처음부터 메이저가 되기 위해 시작하는 것.
그게 지금의 유스 컬처다. 요즘 청년들은 저항이나 새로움 따위의 가치에 관심 없다. 그들이 원하는 건 잘 사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요즘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다, 기존 질서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말이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잘 살고 싶은 게 잘못인가. 청년(들의) 문화에는 이중의 구속이 작용한다. 기존 질서에 부합하는 성공적인 것을 창조하는 것과 기존의 것에 저항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 유스 컬처의 모순을 편의상 a. 메이저 지향 b. 마이너 지향으로 나눠서 생각해보자.
1 . 유스 컬처의 첫번째 모순: 사회는 a를 원하면서 b를 요구한다.
2 . 유스 컬처의 두번째 모순: b가 인정받기 위해선 a가 되어야 한다.
3 . 유스 컬처의 세번째 모순: b를 끝까지 고집하면 잊혀진다.
4 . 유스 컬처의 네번째 모순: 시작부터 a을 지향하면 b가 아니라고 비난받는다.
결론:
반문화 counterculture의 관점에서 진정한
유스 컬처(b)는 존재할 수 없다.
예외
조이 디비전 Joy Division의 리더는 이언 커티스 Ian Curtis 였지만 밴드 내부의 살림꾼은 버나드 섬너 Bernard Sumner 였다. 이언 커티스는 1980년 스물네 살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쳤다. 막 부상하던 밴드였던 조이 디비전은 이언 커티스의 자살 이후 전설이 되었고 지금도 음악을 좀 듣는다 하는 젊은이들은 10대에서 20대 시절 조이 디비전을 필수적으로 거치며 이언 커티스의 파리 춤을 흉내 내는 건 물론이다. 그럼 버나드 섬너는 어떻게 됐을까. 버나드는 이언 커티스가 죽고난 뒤 뉴오더 New Order를 결성한다. 뉴오더는 조이 디비전의 어두운 면, 고딕과 혼합된 암울하고 종말론적인 사운드와 나치 Nazis 를 연상시키는 정치적 데카당스 Decadence를 훨씬 말랑말랑하고 낭만적으로 바꿔놓았다. 뉴오더에도 묘하게 군사적이고 세기말적인 기운이 감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딜레탕티슴 Dilettantisme의 일부다. 뉴오더는 영국을 대표하는 팝 밴드가 되었고, 가사에 자본주의와 관료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는 메시지를 즐겨 삽입하지만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뉴오더의 음악은 춤추기 위한 음악이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 나온다. “뉴오더도 좋긴 한데 그래도 조이 디비전이 진짜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뉴오더가 훨씬 좋다. 조이 디비전과 뉴오더의 멤버였던 피터 훅 Peter Hook이 M2에서 디제이 셋을 했던 십일 년 전에는 클럽 부스에 올라가 춤을 추기도 했다. 그런 만행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뉴오더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물론 친구들은 안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좀 한다 하는 힙스터 Hipster 앞에선 당연히 조이 디비전과 이언 커티스가 좋다고 했다. 그러므로 유스 컬처의 예외는 다음과 같다. 반문화의 관점에서 유스 컬처가 성립하려면 실패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도 극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상징적인 아이콘의 죽음이다.
베케트의 아포리즘
그러니까 우리는 유스 컬처에 대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유스 컬처는 실패해야 한다. 사무엘 베케트 Samuel Beckett는 이렇게 말했다.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질문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들기. 실패해야만 하는 일을 시도하기. 이게 가능한 것일까. 이걸 누가, 왜 할 것인가. 이걸 요구하는(청년다움, 젊은이다움) 사람들은 제정신인가(보통 그런 걸 요구하는 사람들은 젊은 시절 한 가닥 했다고 믿는 장년층이다. 요즘 말로 영포티 Yong Forty).
종교
그런 의미에서 유스 컬처는 종교의 대체재다. 세속적인 뭔가를 바라는 게 아니라 추상적인 가치를 위해 모든 것을 거는 행위. 문화가 종교가 되지 않는 이상 이러한 행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가장 극적으로 실패-자살한 아이콘들은 모두 자신의 이상을 절대적인 가치로 착각한 이들이다. 일종의 숭고한 착각, 문화의 성인. 그들 아래로 추종자들이 모이고 새로운 종교-유스 컬처가 확고히 한 시대의 문화로 자리 잡는다. 그러니 어쩌면 종교가 사라진 시대, 믿음이나 이상이 사라진 지금의 시대에 과거와 같은 유스 컬처가 존재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그런 의미에서 러시아산 유스 컬처가 세계를 휩쓰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지금의 유스 컬처가 뭔가 조금 김이 빠진 것처럼 느껴지는 건 모순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다른 말로는 종교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망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반복해보자면, 그게 잘못인가. 자폭하지 않는 게 잘못된 일인가.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반문화의 관점에서 청년 문화를 요구하는 게 옳은 일인지, 청년다움, 젊은이다움을 요구하는 게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프로보 무브먼트
원래는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청년 문화인 프로보 무브먼트 Provo Movement에 대해 얘기할 작정이었다. 1965년에서 1967년, 단 2년 간 존재했던 프로보는 그 짧은 기간과 공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영향을 끼쳤다. 요즘 서울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따릉이’는 파리의 자전거 시스템을 참고한 것인데, 파리의 자전거 시스템이 참고한 게 프로보 Provo의 화이트 바이시클 플랜 White Bicycle Plan이다. 프로보는 스스로 천명한 자기도발 논리에 의해 2년 만에 자진 해산했다. 실패하는 게 성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계율을 스스로 실천한 것이다. 그것도 폭력적이거나 극단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프로보와 같은 운동이 가능할까. 한국사회에서 누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국은 성공하지 않은 문화나 운동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니 모두가 서태지나 GD처럼 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