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젠더에 관한 조금 더 넓은 범위의 상상력
Writer. 황효진 Hwang, Hyo-Jin 칼럼니스트 Columnist
나이키와 스텔라 아르투아의 경우처럼 느리기는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브랜드 광고들이 제작되고 있다. 이는 곧 현재 가장 중요한 소비자로 떠오른 밀레니얼 세대가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는지, 지금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성의 축구 이야기를 담은 김혼비 작가의 책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춘구>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읽고 난 후, 우연한 기회로 여자 축구 원데이 클래스에 참여한 적이 있다. 평소 축구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도 없고, 꼭 해보겠다고 다짐해본 적도 없었지만 책을 읽으며 끓어올랐던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몇 개 없는 반바지 중 그나마 축구에 적합할 것 같은 바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긴 양말을 신은 채 원데이 클래스가 열리는 실내 축구장으로 갔다. 여성 코치는 우리에게 몇 가지 드리블 기술과 슛을 하는 법, 패스하는 법 등을 가르쳐주었다. “발 날을 세워보세요. 보이시죠? 이 바깥쪽으로 공을 살짝살짝 건드리면서 가보세요.” 가만히 서서 발 날을 세우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공을 몰고 가면서 그 자세를 유지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제 패스를 배워볼게요. 한쪽 발로 런지를 하는 것처럼 자세를 잡고, 반대편 발 안쪽으로 공 가운데를 차면 됩니다.” 그렇게 한다고 했는데, 공은 자꾸만 옆으로 빗나갔다. 맞은편 멀리 서 있는 파트너에게 곧장 뻗어 나가지 못하고 풋살장 한쪽 구석에 놓인 작은 골대 안으로 지겹게도 들어갔다.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긴 하는데…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에 가까웠던 원데이 클래스의 분위기는 팀별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완전히 바뀌었다. 모두 이번 경기에 목숨이라도 건 듯 달리고, 공을 차고, 적극적으로 상대 팀을 수비했다. 몇 분을 뛰고 나자 목이 터질 것처럼 아파왔지만 내 몸의 상태와는 별개로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해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과 팀워크를 맞추며 운동한다는 게, 그리고 몸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든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뛰어다닌다는 게 이렇게 신나는 일이었구나 그날의 원데이 클래스로 축구를 잠깐 경험해보며 몇 가지 의문들이 떠올랐다. 왜 여성들은 어릴 때부터 축구나 농구 같은 팀 운동을 자주 하지 않았을까? 왜 배울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지지 않았을까? 어릴 때부터 이런 운동을 배울 수 있었다면, 혹은 운동하는 여성들을 더 많이, 흔하게 볼 수 있었다면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되지 않았을까?
나이키의 ‘우먼스 저스트 두 잇 Women’s just do it’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 가까운 캠페인이다. 여자 아기의 사진으로 시작하는 이 광고에는 다양한 운동을 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코미디언 박나래와 아이돌 그룹 f(x)의 엠버, 솔로 가수 청하 등 운동복을 입고 춤을 추거나 몸을 풀고 힘껏 달리는 여성 연예인들의 모습도 만날 수 있다. ‘너라는 가능성을 믿어’라는 카피와 함께 ‘너의 미래는 네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뉘앙스의 내레이션이 처음부터 끝까지 깔린다. 딱 붙은 운동복을 입은 여성의 군살 없는 몸매를 부각하는 장면이나 운동과 다이어트를 연관 짓는 메시지는 어디에도 없다. ‘Dream Crazier’라는 제목을 단 해외 버전 나이키 광고는 한층 더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여성 운동선수들의 우는 모습으로 시작하는 이 광고는 여성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하나하나 읊어내려 간다. “우리가 감정을 드러내면 너무 감정적이라고 한다, 남자에게 맞서려고 하면 미쳤다고 한다, 반박하면 너무 불안정하다고 한다, 너무 잘해도 이상하다고 한다, 우리가 화를 내면 너무 신경질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거나 그냥 미쳤다고 한다, 마라톤 뛰는 여자에게 미쳤다고 하고, 여자가 복싱을 하다니 미쳤다고 하고, 23번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여자, 심지어 아이를 낳고도 복귀하는 여자에게는 미쳤다고 한다….” 그리고 광고는 마지막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니 누군가 네게 미쳤다고 해도 괜찮아. 그 미친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보여줘.”
나이키의 이 광고는 운동하고 땀을 흘리고 패배에 분노하며 승리에 기뻐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는 것, 지금 많은 여성이 몸매 관리가 아니라 자신답게 몸을 쓰는 행위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누군가는 물건을 팔기 위한 광고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혹시 그렇다 할지라도 여성의 몸과 운동에 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의 의미는 결코 옅어지지 않는다. 여성의 몸은 보기 좋은 방식으로 매끈하게 관리되어야 한다고 쉽게 말하는 사회에서, 이런 광고를 보며 성장하는 어리고 젊은 여성들은 아마 이전과는 다른 미래를 상상하고 또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여성을 바라본 광고가 하나 더 있다. 김서형과 김윤아, 송은이 등 40대 여성들을 메인 모델로 내세운 맥주 스텔라 아르투아의 캠페인이다. 이 광고에서 김서형은 웨이트리스로 일했던 예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이내 지우고, 김윤아, 송은이와 함께 지금의 성공을 자축한다. 김서형의 얼굴 옆으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건 나만의 길을 만든다는 것’, ‘꿈은 단절되지 않는다’라는 메시지가 새겨진다. 얼핏 평범한 맥주 광고처럼 보이지만, 그동안 술 광고에서 여성이 어떻게 비춰졌는지를 떠올려보면 무척 인상 깊은 변화다. 그동안 젊고 아름다운 여성 연예인들은 소주 광고에 등장해 ‘이 술이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 강조하는 역할을 해왔다. 맥주 광고에서 여성들은 배경으로만 활용되곤 했다. 게다가 40대 이상의 여성이란 약이나 화장품 등의 분야가 아니라면 광고에서는 거의 지워진 존재였다. 그러나 ‘성공한 중년 여성’의 이미지가 광고에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많은 여성들이 이 광고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점에서 스텔라 아르투아의 캠페인은 눈여겨 볼만한 것이다.
광고뿐 아니라 콘텐츠 산업도 마찬가지다. 올해 개봉한 영화 <캡틴 마블 Captain Marvel>은 마블 시리즈 중 처음으로 여성 영웅을 전면에 내세웠다(그동안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블랙위도우가 꾸준히 영화에 등장하기는 했지만, 한 명의 주인공으로 조명된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영화에서 캡틴 마블(브리 라슨)은 어느 날 갑자기 특별한 능력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을 옭아맸던 제약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힘을 남김없이 발휘하며 영웅이 된다. 그리고 그 ‘제약’이란 여성은 할 수 없다고, 여성은 더 강해질 필요가 없다고, 여성은 자신의 힘을 적당히 억눌러야 한다고 말하던 세상의 인식이다. 자신을 조종해왔던 욘-로그(주드 로)에게 “난 너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어”라고 이야기하고는 신나게 우주를 날아다니며 악당들을 무찌르는 캡틴 마블은 그동안 미디어 콘텐츠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여성 영웅이다. 최근 개봉한 배우 라미란, 이성경 주연의 버디물 <걸캅스 Miss & Mrs. Cops>는 어떨까? 이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입에 욕을 달고 살고, 거칠게 몸을 쓰며 수사하는 경찰은 이제껏 여성 배우들에게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던 캐릭터다. 더욱이 라미란이 연기한 박미영(라미란)과 조지혜(이성경)는 올케와 시누이이지만, <걸캅스>는 두 사람의 관계를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식으로 그리지 않는다. 성격이 잘 맞지 않아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리던 둘은 다른 여성들이 약물을 이용한 강간, 불법 촬영 등의 범죄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자발적으로 한 팀이 되어 비밀수사를 시작한다. 그보다 더 실적이 되는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고, 그 사건은 중요하지 않다고, 네가 여자라서 그 사건에 더 예민하게 구는 거라고 말하는 남성 동료들을 뒤로 한 채, 범죄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구해내는 두 여성의 활약상은 뭉클하기까지 하다.
이처럼 사회가 요구하는 ‘여자다움’에 가까운 여성의 모습 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복잡한 인간으로서 여성의 모습을 좀 더 다양한 광고와 콘텐츠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동안 미디어에서 그려져 온 남녀의 이미지를 단순히 반전시키는 것뿐 아니라, 젠더에 관한 조금 더 넓은 범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것이야말로 이미 빠르게 변하고 있는 세상에서 늦지 않게, 반 발짝 앞서 나갈 수 있는 가장 분명한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