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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지 않는 건축, 부상하는 공간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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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지 않는 건축, 부상하는 공간 콘텐츠

 

Writer. 정다영 Chung, Dah-Young 건축 기획자,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각자 사는 도시를 세심히 살펴보자. 최근 내가 사는 서울만 해도 새롭게 지어 주목받은 건축물이 눈에 띄지 않는다. 소형 신축은 조금 늘었다지만, 문화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큰 작업은 많지 않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는 늘 새롭다. 그런 재개발 아파트를 제외하고 주목받는 신축 건물은 뭐가 있을까. 몇 년 전만 해도 서울에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등이 화제였다. 올해는 용산의 아모레 퍼시픽 사옥이 주목을 받았다. 가늠해 보면 한 손에 꼽을 정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근에는 새로 짓는 일 대신 ‘재생’, ‘활성화’, ‘큐레이션’처럼 기존 가치를 살리거나 특정 가치를 선택해서 부각하는 행위가 부상하고 있다. 이 단어들이 건축의 앞뒤로 붙으면서 우리가 공간을 보는 시선도 달라지고 있다. 오래된 산업시설을 문화공간으로 바꾸거나 옥상이나 골목 등 방치된 유휴공간을 새롭게 기획하는 일들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다.

 


 

과거와 달리 새로 지은 건물이 흔치 않은 것은 동시대 사회경제적 조건 탓이기도 하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우리 사회는 더 성장할 수 없다는 불신이 팽배했다. 이런 현상은 ‘기대 감소의 시대’, ‘저성장 시대’ 등으로 명명되었다. 특히 건축이나 도시계획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일은 큰 자본과 노동력이 동원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개발이 한창이었던 1960~70년대와 달리 무언가 새롭게 지어 올릴 수 있는 빈 땅도 거의 없지 않은가. 세계적인 건축가 프랑크 게리 Frank Gehry가 스페인의 소도시 빌바오에 구겐하임미술관을 지었던 때를 떠올려보자. 이 일은 도시 브랜딩의 가치를 한껏 올렸던 사건으로 평가되어 2000년대 초 ‘빌바오 효과 Bilbao Effect’로 고유명사가 된 바 있다. 이제 제2의 빌바오 효과를 기대하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도시와 건축은 새로운 부흥을 위해 또 다른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매력적인 건축과 그 안에서 보이는 공간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러한 건축과 공간이 집합적으로 만들어 내는 도시 풍경은 특별한 시각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 그 정체성은 곧바로 한 도시의, 회사의, 개인의 브랜드가 되기도 한다. 회사가 사옥을 근사하게 만들고 개인이 생활공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예전처럼 거대 자본을 투자해서 규모의 장대함을 보여주는 일은 흔치 않다. 대신 한 장소가 품고 있는 시간성을 드러내는 일이 중요해졌다. 이미 가지고 있는 자산의 가치를 보여주는 일. 그것이 최근 도시와 건축이 선택한 온건하면서도 중요한 공간 전략이다. 공간의 물리적 위상 자체는 축소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예컨대 유럽 중세 도시의 고딕 성당이나 근대 기차역과 같은 곳에서 느낄 수 있는 대공간의 경이로움을 최근 만들어진 공간에서는 충분히 경험하기 어렵다. 빛이 깊숙이 들어와 깊은 여백을 만들 수 있는 적절한 규모와 거리가 확보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간에 여러 의미를 덧붙여 사용하지만 원래 공간 空間이란, 말 그대로 비어있는 곳이다. 최대 효율, 최대 면적을 뽑아내야 하는 한국의 도시건축에서 비워두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제 공간은 여백의 문제보다 스토리의 문제가 된다. 멀리 응시하고 그윽하게 향유했던 공간보다 내 눈앞에 바로 맞닥뜨리는 공간의 질감과 촉감이 중요해졌다. 최근 ‘인스타 성지’로 불리는 장소를 찍은 사진들은 대체로 공간의 깊이감을 담고 있지 않다. 사진 속 공간들은 평평해진 상태의 납작한 그래픽적 결과물로 보인다. 수동 카메라를 세심하게 만져서 심도를 조절하며 사진을 찍는 일은 사라졌고 누구나 휴대폰으로 즉각 촬영할 수 있다는 점도 한몫했다. 더구나 인스타그램의 정방형 프레임은 공간의 깊이감보다는 평면적인 배열을 담기에 더 적절하다. 최근 건축보다 인테리어가 마케팅과 브랜딩 영역에서 중요해진 것도 이러한 현상들을 반영한다. 추상적인 건축보다 즉물적이고 감각적인 인테리어 영역이 더 친근하고 환영을 받는다. 손에 잡힐 수 있는 공간 영역들은 재밌게 이야기될 수 있고 사람들에게 호감을 준다. 실내 공간에 관한 관심은 분명 커졌다. 건물 자체의 외관이나 구조가 낙후되거나 매력적이지 않더라도 실내 공간은 어떤 기획적 관점을 갖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오래된 건물, 사연이 있는 장소일수록 그 공간의 매력은 한층 커진다. 건물은 새로 지어지지 않지만, 공간의 스토리, 즉 공간 콘텐츠는 부상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공간 콘텐츠는 취향의 문제와도 결부되어 다채로운 계열이 생기고 있다. 작지만 매력적인 상점들은 이러한 공간 콘텐츠를 전략적으로 잘 활용하고 있다. 프랜차이즈나 대형 업체보다 경쟁력은 떨어지지만, 승부는 바로 각 장소가 품고 있는 특별한 공간 콘텐츠를 어떻게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게 하느냐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스토리는 텍스트로 만들어져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타고 유연하게 흘러간다. 종이가 아니라 데이터로 전송 가능한 상태로 텍스트가 이동하면서 우리는 손가락만 움직여서 쉽게 이야기를 소비한다. 매우 빠르게 갱신되는 이미지와 함께 말이다.

 

역설적으로 텍스트가 정보데이터가 되면서 텍스트를 담았던 종이의 물성은 감각하기 어려워졌다. 텍스트는 책, 잡지, 신문 등 지면을 벗어나 데이터가 되었지만, 공간은 여전히 떼어올 수 없는 전송이 불가능한 무엇이다. SNS를 통해 소비되는 것은 공간 그 자체가 아니라 공간을 재현하는 이미지와 텍스트다. 각자의 SNS 계정에서 우리는 특정 공간에 대한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지만 동시에 그곳에 가야만 하는 욕망의 충동도 느낀다. 구글맵, 다음과 네이버 지도를 통해 우리는 이제 그 어떤 낯선 장소도 기꺼이 찾아가 볼 수 있다. 오히려 쉽게 가기 어려운 동네,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장소, 아는 사람만 받을 수 있는 온·오프라인의 정보들이 그 공간의 가치를 한층 더 두텁게 만든다. 이러한 공간의 콘텐츠 전략은 정보와 상품이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으로 유통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일종의 환각의 입구 역할을 한다. 이야기를 덧입은 공간은 그 공간이 원래 기능해야 하는 용도와는 무관한 곳이어도 상관없다. 크고 작은 브랜드들이 일종의 쇼룸을 만드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물건을 팔지 않아도 상관없는 장소. 실질적인 상품 소비는 온라인에서 클릭 몇 번으로 이루어지지만, 공간의 생생하고 강렬한 물성과 촉감은 뇌리에 오랫동안 남아 그 브랜드를 기억하는 매개체가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 최근 공간에 대한 일부 콘텐츠 전략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의 빈약함과 가벼움을 비추는 거울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새로운 것을 실험적으로 실행할 수 없는, 자꾸만 과거의 것에 기대어 안전하게 미래를 내다보는 일들이 현재를 빈곤하게 만들지는 않겠냐는 의구심이 생겨난다. 분명 최근 공간을 둘러싼 다양한 관심과 이야기들은 우리 일상을 다채롭게 만들었다. 자신의 작은 방부터, 집, 가게 등을 알뜰하게 개별 기호로 채워놓았다. 그조차 즐길 수 없었던 우리는 이 같은 감각에 목말라 있었다. 하지만 공간에 관한 이야기들이 자꾸 열화 복제되어 가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를 차분하고 성실하게 쌓아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소비하는 일로 변해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그래서 나는 가끔 너무나도 똑같은 스타일로 꾸며진, 폐허를 가장한 서울의 여러 카페와 술집을 드나들다가 숨이 막힐 때가 있다. 그곳은 촬영을 위한 장소이고, 검색 가능한 키워드가 되어 실시간 데이터로 노출되어 버린다. 그런 경험들이 만드는 초조함이 커질 때 가끔 기차역에 간다. 당대 새로운 기술과 시대에 대한 분명한 야심과 과거를 전복하려는 욕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구조물인 역사 驛舍. 그 넓고 깊은 공간 속에서 머무는 기분이 역설적으로 상쾌하다.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사진을 열심히 찍지도 않고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일이 때로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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