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st
고르고 고른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공간들
수많은 이야기가 스쳐 지나가는 가운데, 어떤 것은 쉽게 잊히고 어떤 것은 오래 남는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결국 몰입의 경험이 아닐까. 이제 이야기는 매체를 넘어 공간으로 확장된다. ‘무엇을 볼 것인가?’를 넘어 ‘어디에서 어떻게 경험할 것인가?’가 중요해진 지금, 완전한 몰입을 즐길 수 있는 국내외 공간 여섯 곳을 소개한다. 매체를 넘나들며 이야기에 푹 젖어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Bluedoor books
공간 속 밀도 높은 두 시간
블루도어북스
한남동의 어느 지하, 비밀스러운 입구 뒤로 몸을 숨긴 블루도어북스. 은 은한 조명 아래 책과 음악과 그림이 반짝이는 이곳은 두 시간 동안 온전한 몰입을 선물하는 라운지형 라이브러리다. 미감 높기로 소문난 공간답게 인테리어 애호가들을 설레게 하는 의자와 조명은 기본, 예약제로 운영되는 만큼 섬세하게 신경 쓴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절판 도서, 아트북, 운영자의 인생 책 등 큐레이션에 따라 좌석이 다르게 구현되어 있고, 그림 맞은편 자리에선 화가가 작업 당시 들었던 음악이 흘러나온다. 보다 쾌적한 경험을 위해 휴대폰 사용이 제한되고 촬영 역시 퇴장 10분 전부터 가능하니 독서와 사색을 즐기고 싶다면 블루도어북스로 숨어들어 보는 건 어떨까. 포근한 분위기에서 눈 녹듯 흘러간 두 시간에 홀린 듯 다음 방문을 예약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스트씨네
바다 마을에서 만나는 독립영화의 세계
이스트씨네
자세히 귀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는 속삭임, 독립영화. 강릉의 영화 큐레이션 서점 이스트씨네는 그 조용한 목소리에 주목한다. 붉은 커튼과 극장 좌석으로 채워진 작은 공간은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경험’을 지향하며 책과 함께 독립영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주말 아침 단편영화를 함께 감상하고 갓 구운 빵과 감상평을 나누는 ‘아침상영회’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친절한 큐레이션과 다정한 설명 덕에 입소문을 타며 독립영화의 매력에 빠지기 좋은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2층의 1인 여성 대상 스테이에서 이용자는 대화를 통해 취향에 맞는 영화를 추천받고, 영업이 끝난 서점에서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다. 정동진독립영화제가 열리는 장소와도 가까워, 영화의 여운을 더 길게 이어가기에도 좋다.

ⓒKKAA
활자 너머의 하루키 월드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매혹된 적 있다면? 도쿄의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를 놓치지 말자. 작가가 40여 년간 개인 소장하고 있던 자료들을 바탕으로 지어진 ‘하루키 월드’. 도서관이라는 수식어답게 친필 원고와 초판본, 영감이 되어준 책도 접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그가 창조한 세계의 뒤편을 엿볼 수 있다. 소설 속 음식을 판매하는 카페, 실제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서재, 하루키가 한평생 수집한 LP 컬렉션이 재생되는 오디오룸까지, 활자로만 접했던 이야기들이 공간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파도치는 외관과 터널 형태의 건축물 역시 하루키의 소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시각화한 것. 여기에 시즌별로 다양한 테마의 문학 관련 전시까지 열리니 전 세계를 사로잡은 이야기꾼들의 세계를 온몸으로 거닐어 볼 기회다.

ⓒGoogle Arts & Culture
시대를 초월한 비주얼 스토리텔링의 천국
교토 국제 만화 박물관
만화책이 어린아이들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은 이제 안녕. 소장 작품만 30만 권에 달하는 교토 국제 만화 박물관은 나이에 상관없이 마음을 울리는 만화를 수집하고 연구한다. 그 결과물은 만화를 사랑하는 누구에게나 아낌없이 공개되며, 널찍한 서가에서는 5만여 권의 명작을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다. 별도 예약 시, 원화 등 비공개 소장 자료도 열람이 가능해 만화 팬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공간이다. 또한 만화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에도시대 그림과 일본 애니메이션의 기원을 보여주는 전통 그림연극 공연 등, 박물관의 특색이 드러나는 큐레이션과 프로그램도 눈길을 끈다. 이처럼 다양한 경험 덕에 해외 방문객의 비율도 높은 편이다. 시대와 인종을 초월해 사랑받는 비주얼 스토리텔링 비결이 궁금하다면 꼭 한 번 들러볼 만하다.

ⓒBabylon
명작 영화를 감각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
키노 바빌론
오랜 시간 다양한 예술과 실험이 이어지며 도시만의 고유한 색을 만들어온 베를린. 이곳엔 1929년 개관 이래 지금도 그 시대의 무성영화를 상영하는 키노 바빌론이 있다. 온갖 SF 영화의 시초로 손꼽히는 〈메트로폴리스〉부터 찰리 채플린의 〈골드러시〉까지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들을 무려 오케스트라 라이브로 선보이는, 베를린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앞좌석 예매 시 스크린 밑에서 연주하는 단원들 모습을 엿볼 수도 있지만 어디에 앉든 현장에서 사운드트랙이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풍경은 잊기 어려운 추억이 된다. 요일에 따라 무료 상영도 이루어지고 다양한 국가의 예술 영화나 베를린 기반 아티스트의 미디어 작품도 감상할 수 있어 방문 전 홈페이지 확인은 필수. 색다른 감각과 진중한 호흡으로 영화를 누려보기에 최고의 장소다.

ⓒV&A
‘20세기 대중음악 전설’의 모든 것
데이비드 보위 센터
세계 최대 규모의 디자인 박물관 V& A가 지난해 오픈한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 거대한 아 카이브를 자랑하는 이곳에는 20세기 음악사의 중요한 흐름이 담겨 있다.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지션’으로 꼽히는 데이비드 보위의 자료 9만여 점이 수집돼, 실제 무대 의상과 음악 장비부터 가사 노트, 스케치, 미완성 프로젝트의 아이디어까지 폭넓게 살펴볼 수 있다. 대부분의 기록이 보위의 친필로 남아있으며, 사전 예약 시 원하는 소장품을 프라이빗하게 감상할 수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자료에 얽힌 이야기와 맥락을 함께 들을 수 있어 예술계에 큰 영향을 남긴 팝스타의 세계를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전시 구성은 주기적으로 교체되며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시선으로 아카이브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