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NO人Sight
아날로그 감성을 채우는 테마가 있는 스페이스
오늘날 우리는 일상의 대부분을 온라인에서 해결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물리적 제약들을 마주하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비즈니스가 온라인으로 대거 이동하며 우리 일상 속 온라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사람과 사람 간의 대면적 교류에 제약이 생기면서 현실 세계를 대체할 수 있는 메타버스가 각광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코로나의 기세가 누그러들며, 우리는 다시 이전의 일상을 되찾았고, 온라인으로 충족되지 않는 경험을 채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가 커졌다. 이제, 오프라인 공간은 물건을 구입하고, 먹고 마시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잠시 머물렀다 가는 곳을 넘어,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는 장소로 거듭나고 있다. 디지털 세상에서 채워주지 못했던, 오프라인 공간만이 전달할 수 있는 아날로그 감성과 경험을 충족시켜주는 테마가 있는 스페이스들을 찾아가보았다.
도서관은 살아 있다, 도서관은 진화 중
도서관은 많은 이들이 독서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찾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제 도서관은 책을 읽고 빌리는 장소 고유의 목적성을 넘어, 책을 매개체로 다양한 경험을 소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독서의 즐거움은 기본, 다양한 취향을 반영하여 큐레이팅한 책과 공간이 가진 스토리텔링을 함께 전달하는 도서관들이 주목받고 있다.
어른들의 만화책방, 서점 <그래픽>
ⓒ인사이트전략본부 BX Lab 직접 촬영
이태원 경리단길, 구겐하임 미술관이 떠오르는 멋진 건물에 ‘그래픽’이 자리잡고 있다. 종이책의 두툼한 질감을 표현한 건물의 외관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멋진 인테리어와 음악이 흐르는 이 곳은 도서관이라기보다는 세련된 편집숍처럼 느껴진다. 입장료 15,000원을 내면, 시간 제한 없이 그래픽이 큐레이팅한 다양한 책들과 음악을 즐길 수 있다. 그래픽 내부 곳곳에 최근 인기 있는 만화책부터 <20세기 소년>처럼 고전으로 분류되는 만화책, 패션 잡지나 명품 브랜드의 스토리북까지 일반적인 도서관이나 서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서브컬쳐 장르 도서로 가득 차 있다. 경제, 문학, 과학 등 통상적인 여타 도서관들의 책 분류와는 다르게, ‘불안한 청소년기’, ‘인생은 너무 어려워’ 등 감각적인 문장을 기준으로 책이 진열되어 있다. 또한 스태프들에 의해 엄선된 플레이리스트는 전혀 모르던 장르의 음악과 조우하게 한다. 그래픽은 종이책을 고르고 감상하는 공간을 넘어, 알고리즘으로 가득한 온라인 세계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취향 발견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역사-공간-콘텐츠가 일관된 맥락을 이루는 북카페, <더숲 초소책방>
ⓒ인사이트전략본부 BX Lab 직접 촬영
인왕산 중턱에 위치한 ‘더숲 초소책방’은 1968년 북에서 무장 군인이 청와대를 기습하려다 미수로 그쳤던 ‘1·21사태’를 계기로 세워진 경찰초소를 개축한 곳이다. 과거 산물을 리노베이팅 했다는 컨셉을 살려 ‘컨셔스(Conscious)’함을 담아내는 데 주력했다. 과거를 무작정 청산하기보다 이를 재생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벽돌로 된 초소 외벽 일부와 철제 출입문은 그대로 두었고, 콘크리트 때문에 훼손된 자연환경은 최대한 복구했다. 내부에는 친환경, 비건, 숲을 주제로 한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책들이 주로 진열되어 있다. 또 카페에서 판매하는 빵들은 모두 유기농 밀가루와 천연발효종으로 만들고 있으며, 개인 텀블러를 지참하여 음료를 구입할 경우 할인 혜택은 물론이고, 사탕수수로 만든 자연분해 친환경 빨대를 제공하여,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컨셔스(Conscious)’와 관련된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공간의 미학적인 완성도와 더불어 장소가 가진 역사와 스토리텔링, 그리고 내부 콘텐츠의 조화가 많은 이들이 더숲 초소책방을 방문하기 위해 인왕산 중턱까지 줄을 서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음악과 공간의 앙상블, 온전한 몰입을 위한 청음공간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만 유명했던 청음 공간이 최근 일반 대중들에게 색다른 경험 공간으로 부상했다. 오디오 애호가들이 인생을 바쳐 만든 이 공간들은 그 장소부터 설계까지 오직 제대로 된 청음만을 위해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접할 수 없는 희귀한 음향 장비는 물론, 그 장비를 제대로 튜닝하고 또 적절한 공간에서 울리게 하는 일련의 과정은 음악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디지털 음원에 길들여져 있던 일반 대중에게도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아름다운 선율을 추구하는 공간, <콩치노 콩크리트>
ⓒ인사이트전략본부 BX Lab 직접 촬영 / 콩치노 콩크리트 인스타그램
임진강변을 따라 시원하게 펼쳐진 도로 끝에 위치한 ‘콩치노 콩크리트’는 건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오디오로 작동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9미터에 달하는 높은 층고와 내부 중앙이 넓게 비워진 구조는 소리가 막힘없이 흐르도록 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수직으로 높게 낸 통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외부 풍경을 내부로 끌어들여 공간에 생동감과 변화를 불어넣는다. 이러한 구조 덕에, 콩치노 콩크리트는 임진강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볼 수 있는 ‘노을 맛집’으로도 소문나 있다. 콩치노 콩크리트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이곳이 한 오디오 애호가의 꿈과 열망을 쏟아 부은 ‘덕질의 집약체’라는 사실이다. 치과의사인 오정수 원장이 우연한 기회에 빈티지 오디오를 접하게 되고 진공관 앰프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음악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이 곳을 기획하였다. 그는 1930년대 아날로그 음향 원형을 그대로 들려주기 위해 진공관에서부터 케이블, 앰프, 턴테이블까지 최대한 오리지널리티를 구성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오디오를 위한 최적화된 설계와 디테일에 대한 집착의 산물인 콩치노 콩크리트는, 이 곳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단순한 청음을 넘어 공간 전체와 어우러진 하나의 복합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빛을 듣고 소리를 보는 공간, <모던 클로이스터>
ⓒ인사이트전략본부 BX Lab 직접 촬영
클로이스터(cloister)는 중세 유럽 수도원의 거룩한 공간과 세속적 공간을 연결하는 회랑을 지칭하는 말이다. 수도자들의 쉼터이며, 예술적 교감이 이루어지던 회랑처럼, ‘모던 클로이스터’는 단순한 음악 감상관을 넘어 쉼과 위로의 공간을 통해 특별한 감동의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곳은 최상의 음악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다. 예약 시 감상하고 싶은 음악을 3곡까지 신청 가능하며, 클래식은 물론 재즈, 록, 포크, 팝 등 다양한 현대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전 세계에 300대밖에 없다는 골드문트 아폴로그 오리지널 리미티드 에디션, 케네디 대통령이 사랑했다는 JBL Paragon 스피커를 비롯하여 Tannoy Westminster Royal, JBL 4344 등 조대성 대표가 20여 년 간 모아온 10여 대의 스피커들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갖고 있는 여러 사운드를 정확히 재현하여, 듣는 이들에게 최적의 사운드와 감동을 선사한다. 또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 공연 영상을 함께 틀어주어, 실제 연주회에 온 듯한 생동감을 함께 전달하는 것이 이 곳의 또 다른 특징이다.
e-book과 디지털 음원을 이용하여 언제 어디서든 쉽게 책을 읽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테마가 있는 도서관과 청음공간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들이 공간을 방문하는 목적과 기대치가 더 이상 일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프라인 공간에 요구하는 경험의 수준은 점점 높아졌고,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 정서적 공감과 희소성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몰입 공간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대중들의 니즈에 맞춰 공간은 수동적으로 찾아오는 방문객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본래의 목적성을 넘어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다. 공간의 탄생에 이야기를 담고, 공간을 방문한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 공감하고 몰입하게 하여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며 이 곳을 다시 찾게 만드는 것, 이것이 테마가 있는 스페이스를 많은 이들이 찾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