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김세희
INNOCEAN
나그네의 외투를 벗게 하는 것은 북풍이 아니라 햇볕이듯,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움직이는 건 따뜻함이다. 이 공식은 광고에도 적용된다.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열고, 행동을 바꾸는 건 공감이다. 그렇기에 김세희 CD는 무게를 잡기보다는 친근한 방식으로 다가가려 한다. 그리고 달랐던 나와 너는, 어느새 우리가 된다.
Q. 이노션에 온 지 11년 차가 되셨는데, 그동안 어떤 작업들을 하셨나요?
최근에는 KCC건설 스위첸의 ‘엄마의 빈방’, ‘문명의 충돌’, ‘등대프로젝트’와 한화그룹의 ‘우주 꿈나무’, ‘내일은 무슨 색?’ 캠페인 등을 했고요. 이전 카피라이터 시절에도 스위첸, 현대자동차 쏘나타, 현대카드 캠페인 등을 진행했어요.
Q. 특히 KCC건설 스위첸 영상에는 ‘내 얘기인 줄 알았다’는 댓글이 많더라고요.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잘 포착한 것 같아요.
스위첸의 경우 기존에 만들었던 ‘스위첸다움’이 있었는데 그걸 깨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광고주 역시 그걸 지켜가고 싶어 했거든요. 기획팀과 미팅할 때도 ‘스위첸다움’을 축적의 힘으로 가져가자는 이야기를 했고요. 모든 광고에 정해진 하나의 가이드가 있다기보다는 프로젝트마다 다른 것 같아요. 어떤 캠페인은 일상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제품 광고는 제품 위주로 전달해야 하니까요.
Q. 스위첸 캠페인은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요. 하지만 소재는 황혼 육아, 엄마와 딸 등으로 조금씩 달라지더라고요.
스위첸은 물성적인 집보다는 가치적인 집에 대해 이야기해요. 그래서 주로 가족이나 관계 등을 다루는데, 해마다 시대상을 반영하려고 하죠. 광고를 제작하는 과정 역시 조금 특별해요. 먼저 그 시기의 화두를 찾는 작업을 하고, 그 소재를 광고주와 함께 결정한 뒤에 캠페인 안을 개발하기 시작하거든요.
Q. 지금까지 제작한 스위첸 캠페인은 모두 그러한 과정을 거쳤나요?
‘문명의 충돌’ 캠페인은 부부라는 소재를 다뤘는데요. 당시 화두를 찾던 중에 대한민국 이혼율이 굉장히 높다는 걸 발견했어요. 특히 결혼 4년 차의 이혼율이 제일 높더라고요. 그래서 캠페인 영상 서두에 “결혼한 지 4년, 맞는 게 진짜 하나도 없어요”라는 내레이션이 등장해요. 이처럼 곳곳에 디테일하게 시대상을 반영했죠. 부부라는 소재는 딱히 새롭지 않았지만, 현재 젊은 부부의 이혼율이 높다 보니 큰 반향이 있었어요. 작년의 경비원이라는 소재 역시 시대 화두에 맞게 정한 거고요.
Q. 그러한 아이디어와 작업에 필요한 영감은 어떻게 얻는지 궁금해져요.
책에 밑줄 친 걸 따로 기록해 놓기도 하고, 길 가다가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메모장에 적어서 파일로 모아 두기도 해요. 창작하는 일을 하는 분들은 아마 다 자기만의 폴더가 있을 거예요. 아트 디렉터들도 좋은 그림을 만나면 그걸 저장해두더라고요. 저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모아 둔 걸 꺼내서 한번 쭉 봐요. 그때 뭔가 얻어걸리면 좋긴 한데, 항상 그렇진 않더라고요(웃음).
Q. 작년 스위첸 캠페인에 등장하는 ‘등대’라는 아이디어도 일상에서 얻었나요?
새벽 3시쯤 택시를 타고 퇴근하다가 경비원분을 보고 떠올리게 됐어요. 그때 경비원이라는 소재는 정해진 상태였고, 그걸 어떻게 풀지 고민이 많던 때였어요. 예전에도 경비원분들이 새벽에 랜턴 들고 순찰하시는 모습은 많이 봤는데, 사실 당시엔 그 모습이 크게 와닿지는 않았거든요. 하지만 경비원분들로 화두가 정해진 뒤라서 더 유심히 본 게 아이디어의 시작이 된 거죠.
Q. 그러려면 퇴근 후에도 일에 대한 스위치를 완전히 끄면 안 되겠어요.
끄려고 해도 꺼지지 않아요(웃음). 아마 모든 광고인들이 그럴 거예요. 결과물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늘 머릿속 한편에 있죠. 밥 먹을 때도, 퇴근했을 때도요.
Q. 한화그룹 ‘내일은 무슨 색?’ 캠페인은 애니메이션이라 그런지 쉽게 이입되더라고요. 그렇게 기획한 의도가 있나요?
친환경은 아직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소재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일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사실 당시에 다른 시안도 많았는데요. 진지하게 얘기하기보다는 좀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광고주 역시 긍정적이라 그렇게 진행하게 되었고요.

한화그룹 캠페인 ‘우주 꿈나무’
Q. 한화그룹의 우주 산업을 이야기하는 ‘우주 꿈나무’에는 아이들이 메인으로 등장해서 딱딱하지 않게 느껴졌어요.
광고를 만들 시기에 우주 산업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어요. 우주 산업에 투자한다고 해서 현재의 우리는 얻을 수 있는 게 없잖아요. 특히 코로나 시국이라 경제도 힘들고 삶도 팍팍한데 왜 우주 산업에 돈을 쓰냐는 의견이 많던 때였죠. 캠페인을 통해 사람들이 우주 산업을 친근하게 느끼고, 필요한 산업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어요. 그래서 다음 세대인 아이들을 소재로 이야기했어요. 우리는 실질적 성과를 볼 수 없지만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는 필요한 거라고요.
Q. 그 결과 KCC건설 스위첸과 한화그룹의 캠페인은 모두 소비자의 공감을 이끌어냈어요. 이처럼 브랜드와 소비자 간에 연대감을 만들기 위해선 어떤 점이 중요할까요?
‘내 얘기 같다’ 싶은 포인트가 중요해요. 소비자가 끄덕거릴 수 있는 부분이 있어야 하죠. 한화그룹 캠페인도 어찌 보면 기업이 하고 싶은 얘기를 전하는 메이커 보이스일 수 있거든요. 그런 메시지를 공감의 보이스로 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작업할 때 그 부분에 중점을 많이 두는 편이에요. 소비자가 거부감이 들지 않는 방향으로 화법을 많이 바꾸려 하죠.
Q. 사실 그런 작업이 가장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해요.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면 기사 검색부터 시작해서, 주위 사람을 찾아가서 인터뷰를 하기도 해요. 관련 책이랑 영화도 많이 찾아보고요. 배경지식을 숙지해야만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거든요. 이번에 한화그룹의 캠페인을 같이 준비했던 기획팀과 저희 팀 카피라이터들도 대한민국 우주 산업에 대해 엄청 많이 알아봤어요. 물리학이랑 엔진까지 공부할 정도였죠(웃음).
Q. 공부에 열정적이시네요. 그럼 CD님이 생각하는 좋은 광고란 어떤 광고인가요?
정석적인 이야기지만 목적을 해결하는 광고가 좋은 광고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떤 광고를 만들게 되면 먼저 이번에 해결해야 될 게 무엇인지 정리를 해요. 처음 광고 일을 시작할 때부터 광고는 문제와 해결로 이뤄져 있다고 배웠거든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요.
Q. 그간 작업하신 것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나요?
스위첸 캠페인이요. 사람들 반응도 좋았고, 상도 많이 받았는데요. 그걸 떠나서 가장 잘하고 싶고 재미있는 작업이기도 하거든요. 매해 소재를 찾고 선정하는 작업부터 같이 하기 때문에 6, 7차까지 진행하는데도 그 과정이 모두 지루하지 않고 좋아요.
Q. 작업을 진행하면서 인상 깊었던 순간도 많을 것 같아요.
‘엄마의 빈방’ 캠페인을 진행할 때인데요. 촬영 막바지에 엄마 역할을 맡은 배우가 우는 거예요. 그러더니 갑자기 보고 있던 스태프들도 글썽이더라고요. 그때 안 운 사람이 저랑 기획팀장님뿐이었어요(웃음). 지금 생각해 보면 다들 그 정도로 많은 에너지를 쏟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광고 찍으면서 그럴 일이야’ 싶을 수도 있지만, 그 정도로 배우들과 감독, 스태프 모두가 마음을 모아 준비했다는 거죠. 광고가 온에어 됐을 때도 울컥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그때 한 편의 광고에도 만든 사람들의 기운이 전해지는구나 싶었죠.
Q. 이번 호 주제 ‘자기유형화 ’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게요. 혹시 MBTI 테스트 해 보셨나요?
그럼요. 여러 번 해봤는데 매번 똑같이 나오더라고요. ISTP라는 만능 재주꾼 유형이에요. 개인주의적이고 타인을 잘 신경 쓰지 않는 성향이라는데,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광고는 함께 하는 작업이잖아요. 그래서 그런 점을 바꾸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실은 휴대폰 메모장에 친한 지인들의 MBTI는 다 적어 뒀어요(웃음). 더 잘 이해하려고요.
Q. MBTI를 알면 누군가를 이해할 때도 도움이 되나요?
상대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알면 좀더 배려할 수 있더라고요. 사실 저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인데, CD로서 팀원들에게 피드백을 줘야 할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직설적인 말이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 표현 방식을 조금씩 고치려고 노력 중이에요. 특히 저희 딸이 저랑 정말 다른 성향인데, MBTI를 알고 나서는 이전보다 잘 이해하게 됐어요.
Q. 요즘은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래서 MBTI 같은 도구를 활용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회사에서는 CD이고, 집에서는 엄마이기도 해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자아가 있고요. 하지만 어디선가 들은 건데, ‘그게 다 나’라고 하더라고요. 어떤 사람이든 딱 하나의 모습이기만 할 순 없으니까요.
Q. 그럼 CD님에게 일과 삶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요. 퇴근하다 아이디어를 떠올린 걸 보면 그 두 가지가 분리되진 않은 것 같은데요.
주니어 때는 일과 삶을 분리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시각이 바뀐 계기가 있어요. 예전에 ‘일과 삶의 균형’을 주제로 김훈 작가님을 인터뷰했어요. 그때 작가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원래 인간에게는 삶이 일이고 일이 삶이었는데, 산업화가 되면서 분리된 거다”라고요. 본인은 삶이 일이고 일이 삶인 직업이 좋아서 소설가가 되었다고 하셨어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시각인데 그게 참 와닿았어요. 저 역시 삶이 일이 될 수 있는 이 직업이 좋아요. 그래서 이제는 굳이 분리하려 하지 않아요.
Q. 하지만 그럼에도 지칠 때는 있겠죠?
물론 야근이 잦고 일이 많은 시기에는 지치죠. 하지만 광고 일이라는 게 두 달 정도 바쁘면 한 달은 여유롭거든요. 매일 ‘9 to 6’를 지키기는 어려워도 긴 텀으로 보면 워라밸이 맞춰지는 것 같아요.
Q. 지금까지 14년을 일했어요. 연차가 쌓일수록 생겨나는 어려움도 있을 것 같아요.
다들 그렇듯이 저도 이런 얘기가 무서워요. ‘정체되어 있다’, ‘똑같다’ 같은 말들이요. 그래서 최대한 트렌드를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모르는 분야가 생기면 공부하려고 해요.
Q. 그동안 일해온 시간을 어떻게 평가하고 싶으세요?
‘더 열심히 할걸, 더 잘할걸’ 하는 생각을 해요. 되게 열심히 하던 시기도 있는데, 조금 일을 놨던 시기도 있거든요. 그런 시기들은 계속 미련이 남는 것 같아요. 선배들이 늘 그러셨거든요. 광고 한 편을 다 만들고 나서 보면 고칠 게 또 보이고, 그게 너무 아쉽다고요. 예전에는 그게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는 알겠어요, 그 마음을(웃음).
Q. 나아가려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건 좋은 거 아닐까요? 앞으로의 목표가 궁금해요.
전 충동적으로 매일매일을 살기 때문에 목표는 잘 세우지 않아요. 하지만 새로운 직업을 해보고 싶긴 해요. 그게 뭐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아는 광고 업계 선배 중에 작가가 되신 분도 있어요. 평생의 꿈이었다고 도전하시는 모습이 멋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언젠가는 작가를 해보고 싶어요. 옛날부터 막연하게 드라마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기회가 된다면 광고를 제작할 때 드라마 각본을 써보고 싶기도 하고요(웃음).
“‘내 얘기 같다’ 싶은 포인트가 중요해요. 소비자가 끄덕거릴 수 있는 부분이 있어야 하죠. 한화그룹 캠페인도 어찌 보면 기업이 하고 싶은 얘기를 전하는 메이커 보이스일 수 있거든요. 그런 메시지를 공감의 보이스로 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