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 Manual
무색무취 CD
뚜렷한 색깔이 있는 CD보다는 손바닥 뒤집듯 이랬다저랬다 하는 어떤 색깔로든 변할 수 있는 무색무취의 CD가 되고 싶다는 최희진 CD를 만났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카피라이터를 거쳐 CD가 된 최희진입니다. 카피라이터를 하기 전에는 ‘필름 2.0’에서 반년 정도 수습기자 생활을 했었어요. 그전에는 연극을 했었고요. 원래는 연극연출을 하고 싶었는데 극단에 들어갔을 때 당시 연봉이 360만 원 정도여서, 몇 개월 하다가 때려치우고 광고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Q. 최근 잇츠스킨, 정몰, 스위첸 등의 광고를 진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이종격투기 선수 김동현 씨가 출연한 정관장 정몰 시리즈가 무척 재미있었는데요. 이 광고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정관장의 모든 제품을 판매하는 정관장 몰을 론칭하는데 SSG닷컴처럼 재미있는 크리에이티브를 원했어요. 기획이 정관장 몰의 줄임말인 ‘정몰’을 키워드로 가져와서 어떻게 하면 재미라는 그릇에 실체를 담아 브랜딩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정말 건강에 미친 사람들의 몰’ 이라는 크리에이티브 콘셉트를 만들게 됐어요. 건강에 미친 사람들을 상대하는 데는 김동현 씨가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캐스팅을 진행했고 사실 바이럴 필름으로 기획된 거라 예산이 적은 편이었는데 김동현 씨를 잘 설득해 만들게 됐죠.
Q. KCC 건설 스위첸 광고의 경우, ‘집’에 대한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광고는 어떻게 기획하게 되셨나요?
작년 겨울에 우연히 위안부 할머니 후원 시설인 나눔의 집과 관련된 뉴스를 보게 됐어요. 나눔의 집 할머니들을 보면서 이런 집들에 관한 프로젝트를 하면 좋겠다 싶었죠. 그 겨울에 나눔의 집을 직접 다녀오고 더 확신이 들었고 스위첸 광고주에게 ‘기억해야 될 우리의 집’ 시리즈를 하자고 제안을 했어요. 광고주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많은 집을 찾게 됐어요. 버려진 독립투사의 집도 있었고, 앞서 말씀드린 나눔의 집도 있었고, 지금 온에어 되고 있는 대한민국 첫 번째 집인 상해임시정부도 있었죠. 여러 가지 이유에서 상해임시정부가 의미가 있겠다고 판단해 그 소재가 온에어가 됐어요. 소재 중 하나로 평화의 집도 있었는데, 갑자기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는 바람에 접었어요. 제 마음 같아선 한 3년 정도 집 시리즈 캠페인을 해보고 싶어요.
Q. 그동안 많은 광고를 제작하셨을 텐데요. CD님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광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온에어 되지 않은 제 컴퓨터 안에 있는 광고들? (웃음) 때때로 의미 있는 것들은 있었던 것 같은데 아직은 딱히 하나를 꼽을 순 없을 것 같아요. 제가 가까운 선후배들에게 하는 말이 있어요. 광고하는 사람들이 칸 국제 광고제를 준비하는데, 그거 말고 ‘까인 광고제’를 한번 만들어보자고요. 사실 이런 주제로 책을 써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출판사랑 접촉한 적도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광고들은 위험하고, 너무 멀리 간, 까인 광고들이거든요.
Q.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한때 어떤 브랜드의 슬로건이었는데 제가 좋아하는 말이 ‘See the unseen’ 이에요. 생각이든, 메세지든, 비주얼이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자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Q. 이번 ‘Life is Orange’의 주제는 ‘개념 소비’입니다. 일상에서 CD님이 실천하고 있는 개념 소비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희 집엔 옷장이 딱 하나예요. 그 옷장에서 하나가 나가면 하나를 들여요. 더 늘리지는 않아요. 의식적으로 개념 소비를 하려고 하진 않는 것 같아요. 옷장에서 나가는 옷들을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가게로 보내고, 그 다음에 옷을 구입해요. 그리고 손때 묻은 걸 좋아해서 월 하나 사면 오래 쓰는 편이에요. 지금 들고 다니는 지갑도 7년 전쯤에 배낭여행을 갈 때 실용성을 생각해서 구입했어요. 돈을 넣는데 편리해서 굳이 새로 살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어요. 몇 번 잃어버렸는데 낡아서인지 사람들이 가져가지 않고 다시 돌려줘요. (웃음)
Q. 진행하셨던 프로젝트 중, 개념 소비가 활용된 프로젝트가 있었다면 소개해주세요.
굳이 연결을 시키자면, 잇츠스킨 브랜드 캠페인이였던 ‘잇츠 마이 스킨’인 것 같아요. 잇츠 마이 스킨이라는 슬로건은 너무 많이 꾸미지 말고, 화장품도 많이 쓰지 말고, 내 피부에 맞게 살자는 거였어요. 처음 제 의도와는 달리 영상은 혜리가 굉장히 예쁨예쁨하게 나왔는데, 시작은 스포츠 브랜드처럼 여자들의 맨 얼굴이 사실적으로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카피도 ‘나답게, ‘내 피부답게’였어요. 사실 예쁘게 하고 잠을 자거나, 예쁘게 운동을 하진 않잖아요. 여자들의 피부 앞에 붙는 수식어가 ‘예쁨’,‘어림’ 이런 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목표했던 것보단 이야기가 덜 됐던 것 같아서 아쉽지만, 이런 메시지를 던질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Q. 개념 소비를 유도하는 인상적인 브랜드 마케팅이나 광고가 있었다면 무엇인가요?
예전에는 브랜드 철학, 정신 같은 걸 따져 탐스 Tom's 같은 걸 사기도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또한 상업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왜냐하면 모순이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파타고니아 Patagonia라는 브랜드를 좋아하는데 솔직히 비싸요. 브랜드라는 포장을 입혀서 본질보다 더 값을 매겨서 하는 활동이 모순적으로 느껴져서 이 일을 오래 하지는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아주 가끔 들기도 해요. (웃음)
Q. 만약 CD님이 개념 소비와 관련된 캠페인을 만든다면, 어떤 캠페인을 만들고 싶나요?
예전에 서울시에 한번 제안해보고 싶었던 게 있었어요. 제가 아름다운 가게에 가끔 가는데, 막상 가면 딱히 살 게 없어요. 관리도 잘 안 되어 있고, 저렴하지만 사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들어요. 그래서 아름다운 가게를 브랜딩 해주고 싶어요. ‘레인보우 스토어’라고 예를 들어, 가로수길에는 블랙 스토어가 있어서 블랙에 관한 모든 재활용 물건들을 모아놓은 스토어가 있는 거예요. 인사동에는 레드 스토어, 청담동에는 퍼플 스토어 이런 식으로요. 꼭 광고가 아니더라도 아름다운 가게나 서울시 같은 곳에서 이런 캠페인을 해보고 싶어요.
Q. CD님은 어떻게 처음 광고에 입문하시게 됐나요?
대학에서 4년 동안 연극을 했는데 사회로 나가 연극을 하려니 박봉에 부조리였어요. 그래서 소극장에 몇 달간 있다가 이건 내 길이 아니다 싶어 연극을 그만두고, 제가 좋아하는 일이 월까 고민을 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써 내려갔는데, 첫째는 얽매이는 걸 싫어한다. 둘째는 잡다한 호기심이 많다. 세 번째는 글로 표현하는 걸 좋아한다. 이렇게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플러스하다 보니까 카피라이터라는 길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Q. 광고인으로서 느끼는 광고의 매력과 애환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처음 광고의 매력을 느끼게 된 건 산토리 위스키 Santory Whisky의 ‘Old Is New’라는 캠페인이었어요. 오래된 게 새로워질 수 있다는 한마디가 스무 살의 제게는 그 어떤 글보다 인상 깊었어요. 카피라이터 때는 기막힌 한마디를 쓰고 그것이 온에어됐을 때 짜릿함이 매력이었고, 막상 CD가 되고 나니 매력보다는 애환의 감정을 더 많이 느끼긴 해요. 이유는 카피라이터 때는 제 아이디어나, 카피를 CD가 못 팔아오면 CD를 탓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최전방에 제가 있기 때문에 탓할 사람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애환을 많이 느끼는 요즘이에요.
Q. 슬럼프에 빠졌을 때 이겨내는 CD님만의 방법이 있나요?
카피라이터 때는 무조건 떠났어요. 여행을 떠나거나, 회사를 떠나거나. 그런데 CD가 되니까 떠날 수가 없어요. 휴가 때도 카톡을 켜 두어야 하고요. 계속 진행하는 일들도 있고, 팀원들에게 컨펌해줘야 할 것들이 있으니까요. 이제는 떠나기보다는 견딜 줄 알게 된 것 같아요.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듯 지나가겠지, 라고 생각하고 흘러가는 나를 봐요. (웃음)
Q. 요즘 CD님이 빠져 있거나 영감을 주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요즘 빠져 있는 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인데, 사실 영감은 모든 것에서 받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볼 때 좋은 것들을 캐치하려고 노력했는데, 지금은 그냥 편안하게 모든 걸 열어두고 봐요. 주니어 때는 ‘아, 저 아이디어 내가 먼저 써야지’ 하며 모든 게 조급했다면, 지금은 차곡차곡 저장해둔 것들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것 같아요. 스위첸 같은 경우가 그런데, 예전에 나눔의 집에 대한 뉴스나, 영화 ‘아이 캔 스피크’나 ‘귀향’을 보면서 저런 메시지를 광고에서도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결과이거든요. 오늘 유튜브를 보니 조회 수 800만 가까이 됐더라고요. 예산이 적어 쉽지 않은 숫자인데, 조금은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광고를 만든 것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Q. CD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CD의 기준이 궁금합니다.
좋은 CD의 기준은 영원히 모를 것 같아요. 제 과정을 이야기하면, CD 초년 차 때는 의욕이 넘쳐서 일, 사람, 모든 것에 기대하고, 모든 것에 실망했어요. 그러면서 점점 균형을 찾는 중이에요. 내 기준을 자꾸 내려놓고 사람들을 보려고 해요. 이 과정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으면 해요.
Q. 좋은 CD가 되기 위한 CD님만의 노력은 무엇이 있을까요?
좋은 CD가 되기 위한 CD님만의 노력은 무엇이 있을까요?
Q. 올해가 가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요?
팀원 세팅? (웃음) 지금 카피 한 명에 아트 한 명밖에 없는데, 직종별 2명씩의 팀원을 세팅하는 게 현재의 목표에요.
Q. 벌써 마지막 질문인데요. CD님은 어떤 CD로 기억되고 싶나요?
이런 걸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것도 곧 잘하고, 이런 색깔인 줄 알았는데 저런 색깔도 가지고 있는 CD가 되고 싶어요. 제가 진행했던 캠페인 중 정몰은 웃기고, 스위첸은 진지하거든요. 오락가락하는 CD가 되고 싶어요.
Q&A
최희진CD팀의 팀원들이 그녀에게 직접 묻다.
1.
지금은 담배를 끊으셨지만,
가장 최근에 담배를 생각나게 만든 일은 무엇인가요?
CD 되고 1년에 한 대씩은 폈던 것 같아요. 벽 같은 광고주를 만났을 때였던 것 같아요.
2.
요즘 빠져서 보고 계시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처음엔 조선의 독립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는데 회차가 더할수록 각 개인의 자립과 독립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흥미로워요. 신분제도로부터의 독립, 과거로부터의 독립, 고정관념으로부터의 독립, 편견으로부터의 독립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사가 명문이에요.
3.
CD님이 만드신 광고 중
'인생작’은 무엇인가요?
아직 인생작은 없어요. 인생작 세 개를 만들면 광고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는데...(웃음) 그런 날이 오겠죠?
4.
만약 영화배우가 된다면
어떤 배역을 맡고 싶으신가요?
액션 배우가 되고 싶어요. 얼마 전에 ‘마녀’라는 영화를 봤는데 몸을 그렇게 쓰고 싶어요. 맞고 겨우 한대 때리는 거 말고 모두를 압도하는, 전지전능한 액션 배우.
5.
취미가 산행이신 CD님,
산행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산을 정말 싫어했어요. 30대가 되면서 내가 싫어하는 일을 한번 해보자란 생각에 두 가지 결심올 했는데, 하나는 회사를 오래 다녀보자, 또 다른 하나는 산에 가자. 그래서 2년에 걸쳐 백두대간 종주를 했어요. 2주에 한 번, 금요일 밤마다 새벽 산행을 했죠. 산을 타다 보니까 바라보는 산과 올라가는 산이 달랐어요. 산행의 매력은 야생성에 있는 것 같아요. 나의 날 것도 보게 되고, 자연의 날 것도 보게 되는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CD’S ESSAY
Writer. 최희진 Creative Director
안 보이는 그 자체를 즐기면 되잖아?
종교는 없지만, 얼마 전 우연히, 반야심경의 현대어 번역을 보게 됐다. 그 글을 출력해서 내 책상머리에 붙였다. ‘크리에이티브’라는 안개 속을 걷는 나에게 필요한 글귀였다. 그리고 누군가 크리에이티브는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묻는다면, 반드시 이 글을 이야기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일부를 발췌해 적는다.
“보이는 것에 구애 되지 마. 들리는 것에 매달리지마. 미래는 그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아. 무리해서 비추어보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안 보이는 그 자체를 즐기면 되잖아? 그게 살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녀석이지”
새로운가? 독특한가? 의미 있는가?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크리에이터는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내 크리에이티브의 불신으로 돌아온다. 흔들리면어떤가? 모든 게 결과가 아닌 과정인 것을. 조금은 이 일에 힘 빼고, 가벼워질 필요가 있다.
한 때, 좌카피라고 불렸던 왼손잡이 CD.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 순간순간 애쓰며 균형감각을 익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