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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하게, 그러나 선하게

방현욱 카피라이터
좋은 광고는 문제를 잘 푸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다시 쓰는 데서 시작된다. 주어진 브리프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그 이면의 맥락을 먼저 읽고, 과제를 내 것으로 삼는 순간 비로소 아이디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철학과 출신의 카피라이터가 광고판에서 살아남은 방식은 논리나 기교보다 질문에 가까웠다. 해운대 해변을 지키는 초대형 라이프가드를 세우고, 이름 없이 달리던 자동차들에게 이름을 찾아주고, 전기차에 발칙한 성격을 불어넣는 동안, 그는 매번 같은 자리에서 출발했다. ‘이걸 왜 문제라고 생각했지?’ 이노션 카피라이터 방현욱을 만났다.
정답보다 질문이 먼저인 사람
Q.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광고의 영역으로 넘어온 경로가 독특해요. 어떤 연결고리가 있었나요?
철학과 시험은 꽤 흥미로워요. 예를 들어, ‘지금 앞에 보이는 칠판은 무슨 색인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이번 학기에 배운 내용을 토대로 가장 어려운 문제를 스스로 출제하고 그 문제에 답하시오.’ 말 그대로 답 안 나오는 순간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뭘 배웠나 생각해보면 결국 ‘왜?’를 던지는 일이었어요. 너무 당연해서 아무도 안 묻던 것들을 의심해 보는 눈. 타당한 전제를 쌓아 내 논리를 만들고 그걸 하나의 주장으로 만들어가는 일. 그런 점이 광고 업계랑 착 맞아떨어졌어요. 정해진 답이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더 좋았습니다. 없던 질문이 세상에 툭 튀어나오는 순간, 꽉 막혀 있던 문제가 의외로 쉽게 풀릴 때가 있어요.
Q. 이노션 인턴으로 시작해서 정직원 전환에 떨어지고, 타 대행사를 거쳐 다시 이노션으로 돌아오셨어요. 드라마 [미생] 의 장그래처럼 ‘이 또한 도약을 위한 좌절’이라고 생각했다고요.
2015년에 인턴 서른세 명 중 카피라이터는 다섯 명이었어요. 결과적으로 다섯 명 다 전환이 되지 않았어요. 크게 슬프지는 않았어요. 어차피 결국 이노션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한 번 도전한 것에는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이니까요. 당시에 김세희 CD님, 방현석 CD님이 제가 못해서가 아니라 회사의 여건이 안 돼서 그런 거니까 꼭 다시 보자고 많이 위로해 주셨어요. 그렇게 타 대행사에서 일하다가, 인턴 때 저를 좋게 봐주셨던 김정아 사장님, 배금별 ECD님 덕분에 이노션으로 다시 돌아오게 됐습니다.

Q. 현재 소속된 제작 부문은 팀이 없는 풀(Pool)제로 운영된다고 알고 있어요. 새로운 풀에서도 일을 잘할 수 있는 카피라이터님만의 노하우가 있나요?
카피라이터와 아트디렉터의 경계가 모호해진 요즘엔 풀 안에서 자신만의 색깔과 캐릭터가 더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저는 회의실에 함께하는 분들에게 영감과 자극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편입니다. ‘저렇게까지 해도 되나?’에서 ‘저렇게’를 담당하고 있죠. 해야 하는 것보다 그냥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합니다. 발칙한 아이디어를 잘 내는 편이에요. 발상을 할 때는 주로 음악에서 영감을 얻어요. 플랫폼 세 개를 씁니다. 특히 스포티파이는 알고리즘이 훼손되지 않게 제3세계의 음악만 들어요. 만들고 싶은 크리에이티브를 떠올리고 그것과 결이 비슷한 음악을 찾다 보면 거짓말처럼 딱 걸릴 때가 있어요. 그 음악을 열 번, 스무 번 듣다 보면 질감이나 색깔 같은 것들이 떠오릅니다. 어떤 폰트를 쓰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하고요. 그런 식으로 이미지를 먼저 만들고 카피는 나중에 쓰면 더 잘 풀리는 것 같아요. 주변 분들이 홍대병 걸렸다고 하는데,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어쩔 수가 없어요.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뇌 구조가 된 것 같아요(웃음).
Q.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정의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새로운 과제를 받았을 때, 본인만의 ‘문제 정의’ 방식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왜 그런 말 있잖아요, 사람들이 드릴을 찾는 건 사실 구멍을 뚫기 위해서라고. 클라이언트한테 문제가 왔을 때 저는 ‘이게 왜 문제일까?’ 먼저 생각해요. 그 시장, 회사 안의 맥락을 먼저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그러면 페이퍼에는 드러나지 않는 진짜 니즈가 보이는 것 같아요. 그렇게 파헤치다 보면 사실은 구멍조차 필요 없었다는 걸 알게 될 때도 있어요.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걸 누군가의 ‘문제’라고 바라보면 자꾸 타자화되는 것 같아서, 내 ‘과제’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해요. 한 글자 바꿨을 뿐인데, 앞으로 개선될 여지가 더 많아 보이는 긍정적인 착시가 생기죠. 일단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에 부담도 줄고요.
냉장고 구석에서 보물을 찾는 법
Q. 그럼 문제가 아닌 ‘과제’라고 부를게요. 눈앞의 과제와 크리에이티브한 결과물을 어떤 방식으로 연결하나요?
장사가 잘 안되는 식당을 비유해 볼게요. 일단 가서 냉장고를 한번 열어보는 거예요. 그게 광고주가 저희한테 준 RFP가 되죠. 냉장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광고주 눈에는 별거 아니지만, 정말 신선하고 좋은 재료가 있을 때가 있어요. ‘원물만 잘 가공해도 장사가 되겠다’ 싶은 것들이요. 그걸 찾아내는 게 크리에이티브의 시작이자 끝인 것 같아요. 반면 냉장고 안에 정말 살릴 게없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때는 같은 재료를 어떻게 다르게 가공할까 고민해요. [흑백요리사] 에서 편의점 재료로 요리를 만드는 미션처럼, 그들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바꿔보는 거죠.
Q. 실제 사례를 이야기해 볼게요. ‘세상에서 가장 큰 라이프가드’ 캠페인을 진행하실 때 이틀 만에 드래프트를 만들어 제안했다고요.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해운대 바로 앞, 그랜드 조선 부산 외벽의 초대형 디지털 사이니지에 거대한 라이프가드가 나타나 해수욕장 이용객에게 기상 변화 알림과 경고를 전하는 프로젝트죠. 이노션이 매체 운영을 맡고 있는데, 초창기에는 매체를 쓰는 광고주가 많지 않았어요. 매체가 알려지려면 먼저 임팩트 있는 집행 사례가 필요했죠. 그때 김정아 사장님께 “해운대 수상구조대를 도울 수 있는 아이디어는 어떨까요?” 하고 넌지시 말씀드리자, 사장님이 “1시간 안으로 페이퍼 만들어 볼 수 있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건 그냥 하라는 이야기잖아요(웃음). 바로 만들어서 그날 오후에 미팅을 했어요. 시안도 아닌 개념만 있었고, 이미지도 AI로 러프하게 만든 것뿐이었지만, 광고주도 너무 좋다며 빨리하고 싶다고 해서 그때부터 달리기 시작했어요. 물론 과정이 쉽지는 않았어요. 구조 팀장님, 대장님뿐만 아니라 해운대구청 주무관님, 해운대관광시설사업소장님까지 미팅을 정말 많이 했는데, 처음에는 프로젝트 자체에 반감이 있으셨거든요. ‘해상 사고’와 같은 나쁜 뉴스를 더하는 게 부담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위험한 상황을 부각하려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해수욕장’을 만들려 한다고 포지셔닝을 바꿔 말씀드렸더니, 반응이 달라지더라고요. 10분 미팅을 위해 당일치기로 부산 출장을 간 적도 있어요. 진심이 전해졌는지 그다음부터는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셨습니다.

Q. 캠페인을 마치고 “첫째도 둘째도 진정성이었다,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아이디어는 빛을 본다”라고 하셨어요. 그 진정성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요.
진정성은 책상 위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실제로 겪어낸 삶 속에 들어가봐야 그제야 미약하게나마 가늠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아이디어는 빛을 본다’는 말은 사실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제가 한 건 별로 없다고 생각해요. 현장에서 일하시는 구조대원분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해오셨던 일이었고, 저는 그냥 조명을 살짝 옮겨드린 느낌이에요. 진짜 진정성은 그분들한테 있는 거죠.
Q. 저는 개인적으로 현대자동차 ‘이름을 모르는 자동차’ 캠페인도 감동적으로 봤어요.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도 정작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것들에게 이름을 찾아주는 거잖아요.
진광혁 GCD님이랑 함께 낸 아이디어예요. 제가 8살 된 아들이 있는데, 지나가는 차를 보며 “경찰차! 소방차!” 하고 말하는 시기였어요. 그럴 때마다 “저 구급차 이름은 쏠라티야.” 하고 알려줬어요. 우리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제복을 입는 분들, 그분들의 가슴에는 항상 이름이 새겨져 있잖아요. 한 번이라도 그 이름을 기억해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Q. 무신사 ‘Background Donation’ 캠페인은 소상공인 지원이라는 메시지를, TVING ‘NOT JUST THE BACKGROUND’ 캠페인은 환경이라는 메시지를 다뤘어요. 공익적인 메시지일수록 크리에이티브한 요소가 더욱 중요할 텐데요. 각 캠페인을 기획할 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고 실행하나요?
세상에는 버려지는 미디어가 정말 많다고 생각해요. 쇼핑몰에 있는 무지 배경이라든지, OTT 볼 때 섬네일 고르다 끝나는 그 시간이라든지. ‘우리가 가장 많이 보내는 시간 속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TVING ‘NOT JUST THE BACKGROUND’ 캠페인도 그런 맥락이에요. 환경의 날을 맞아 OTT 섬네일 포스터의 배경만 잘 보이게 두고, 인물은 흐리게 만들어서 그동안 보이지 않던 ‘자연’을 강조했어요. 그 결과 실제 시청률이 600% 넘게 오르는 성과를 냈죠. 그동안 주목받지 못하던 것을 미디어화시키는 것, 그 자체로 훌륭한 아이디어가 된다는 걸 그때 확인했어요.
Q. 한편 현대자동차 ‘전력을 다해, CASPER Electric’ 캠페인은 전기차가 직접 말을 걸며 장점을 드러내는 구조예요. 기존 자동차 광고가 빠르고 현란한 영상 위주의 전개라면, 이 프로젝트는 언어유희, 아이러니, 상황극의 방식을 통해 ‘전력을 다해’라는 핵심 카피를 강조했죠. 그야말로 카피라이터의 놀이터라고 할 만큼 즐거워 보였는데, 어떻게 작업했나요?
그런 재미있는 프로젝트는 진짜 만나기 쉽지 않아요. 저한테는 명절 같은 광고였어요. 이현철 CD님이 전기차가 나와서 세상을 하이재킹한다는 콘셉트를 잡아주셨고 제가 생각한 건 ‘데드풀 같은 성격의 범블비’였어요. 일단 캐릭터를 잡고 나니 그때부턴 카피가 그냥 술술 써졌어요. 캠페인이 잘 되다 보니 일본에서도 비슷한 톤 앤 매너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요. 아무래도 까부는 건 만국 공통의 언어인 것 같아요.
내가 나의 레퍼런스가 되는 일
Q. 매번 새로운 과제 앞에 서야 하는 일인데 두렵거나 막막하진 않나요?
솔직히 두려운 건 있죠.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적당히 모르다 보니까 탐색해 가는 재미가 있어요. 무섭다기보다 스릴에 가까운 느낌이에요. 신입사원 교육을 맡았을 때 이런 말을 했어요. “이노션에 온 걸 놀이동산 자유이용권을 끊었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타고 싶은 거 타도 되고, 웨이팅 걸어놓고 타도 되고, 질리면 다른 거 해봐도 되고, 그냥 돌아다니기만 해도 되고, 구경만 해도 된다. 어디 하나 매여 있을 생각만 하지 말아라. 여기는 너무너무 잘 놀 수 있는 공간이다.” 실제로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만약 카피라이터가 되지 않았으면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 싶은 것들이 정말 많거든요.
Q. 평소에 아이디어를 발견하기 위해 일상에서 의식적으로 하는 습관이나 훈련이 있나요?
저는 좀 강박적으로 풍경을 바꿔요. 출근할 때도 버스, 지하철, 자차. 노선도 다르게, 환승도 다르게, 건너는 다리도 어떤 날엔 한남대교, 어떤 날엔 동호대교. 집까지 러닝으로 퇴근한 날도 있 어요. 보이는 풍경 자체를 바꿔야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OTT도 랜덤 보기로 봐요. 취향이 아닌 것도 강제로 한 편은 무조건 봐요. 절대 안 할 것 같은 아웃풋을 넣는 거죠. 또 하나는 하루에 해외 광고 하나씩 보고 나름대로 분석해 보는 거예요. 그런 작은 습관 하나의 복리가 무서운 것 같아요.
Q. 이노시안에게 본인을 소개하는 글 마지막에 “앞으로도 새롭고 재밌고 선한 아이디어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라고 쓰셨어요. 셋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요?
셋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저는 ‘선한 아이디어’를 고르고 싶어요. 제가 말하는 ‘선함’은 결과물만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에도 걸려 있어요. 일을 하다 보면 타협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적당히 좋은 레퍼런스를 살짝 틀만 바꿔서 가져오고 싶은 유혹이 생기는 날도 있죠. 그래도 편법 안 부리고, 꾀 안부리고, 정직하고 우직하게, 엉덩이 무겁게, 그냥 합니다. 결국 내가 나의 레퍼런스가 된다는 생각으로요. 부끄럽지 않아야 오래오래 재밌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Q. 한 인터뷰에서 “다수를 위해 옳은 목소리를 내는 게 광고이며, 아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광고를 만들고 싶다”라고 하셨어요. 카피라이터님이 만들고 싶은 광고에 대해 말해주세요.
인턴 때 마지막 면담에서 광고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로부터 딱 10년이 지났는데, 광고가 조금씩 사회에 좋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회의실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들을 보면, 의식이 한층 성숙해졌다는 게 느껴져요. 광고는 분명한 타깃이 있지만, 결국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기 때문에 어떤 가치도 함부로 훼손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이런 노력들이 광고 업계 전체의 격을 조금씩 올릴 거라고 믿어요. 제 아이가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에요. 아이의 세상이 커지다 보니 그 세상까지 제가 흡수하게 되더라고요. 그 세상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일하는 태도나 결과물에 대한 청구서가 두꺼워진 느낌이에요. 책임감을 느낍니다. 발칙하고 새롭고 낯선 것들 안에서도, 그 물밑에서 수많은 올바름을 지켜나가려고 해요. 그 가치는 잃지 않고 싶어요.
Insight
나에게 영감을 주는 것

이면지
크기도 세기도 제각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날아다니는데, 그걸 일렬로 줄 세워 타이핑하는 일이 늘 어색했습니다. 한때는 똑같은 디자인의 노트만 스무 권쯤 썼어요. 생각을 아카이빙 한다는 게 좋았죠. 그러다 어느 날 그게 집착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좋았던 아이디어, 그 좋았던 아이디어를 떠올린 나. 시간이 지나 보니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었습니다. ‘이런 거 해볼까?’, ‘이렇게까지 가도 되나?’, ‘이거보다 더 좋은 거 없나?’ 그냥 그런 고민을 하는 낮과 밤과 그 사이의 긴긴 새벽이 전부였어요. 지금까지의 나를 버릴수록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고요.
그때부터 이면지를 씁니다. 앞면에는 지난 프로젝트에서 짜냈던 아이디어들이 인쇄되어 있어요. 끝난 것들입니다. 그 뒷면에 새 생각을 가볍게 갈겨써요. 어차피 버려진 면이라 생각하면 잘 쓰려는 힘이 빠지고, 그 자리에 더 멀리 가는 생각이 들어찹니다. 지난 아이디어의 뒷면이 다음 아이디어의 앞면이 되고, 저는 그사이를 옮겨 적기만 합니다. 사실 아이디어라는 건 늘 거기 그대로 있고, 저는 그걸 계승하는 한낱 도구에 불과한 게 아닐까, 뭐 그런 쓸데 없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러나저러나 제 아이디어의 절반은 17층 프린터 덕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전합니다.

블랙스크린
‘이번엔 진짜 각 잡고 써봐야지.’ 그렇게 마음먹고 쓴 카피 중에 좋았던 건 정말 하나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카피를 좋아하지도 않고요. 다른 분들 아이디어 파일을 열어봐도 그래요. 정작 눈에 들어오는 건 멋 부린 한 줄이 아니라, 그 안을 설명하려고 앞에 무심코 적어둔 말들일 때가 많아요. 우리가 일상에서 으레 하는 말인데 그게 그 상황 속에서 퍼즐 조각처럼 탁 들어맞을 때, 좋은 카피가 되더라고요. 편하게 말하듯 나온 게 나중에 다시 봐도 좋습니다.
저는 대화하면서 아이디어를 풀어내는 타입이에요. 요즘엔 그 상대가 꽤 시니컬한 AI인데, 이 친구가 똑똑하긴 한데 묘한 한계가 있더라고요. 뭘 던져도 일단 좋다고 하거나, 조금 깊이 들어가면 했던 말을 살짝 바꿔서 또 하거든요. 그렇게 빙빙 돌다 막히면, 결국엔 까만 화면에 비친 저를 붙잡고 이야기하게 됩니다. 제가 뱉은 생각에 화면 속 제가 반박하고, 그 반박을 제가 다시 비틀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문답을 주고받아요. 일종의 야매 산파술이죠.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이쪽 저든 저쪽 저든 누구 입에서든 ‘아, 이거다’ 싶은 게 하나 튀어나옵니다. 안 나오면? 덜 한 겁니다. 더 하면 돼요. 원주민들 기우제처럼 뭐라도 떨어질 때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