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eas
충동과 직관으로 완성한
20년의 취향 기록

김도훈 영화평론가
소소(小小) 소비가 일상적인 선택의 기준으로 자리한 지금, 소비는 더욱 개인의 취향과 판단에 가까워지고 있다. 김도훈 영화 평론가는 이런 흐름 속에서 계획보다 감각을, 효율보다 확신을 중시하며 소비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충동과 직관으로 완성한 20년의 취향 기록 20년 동안 세계를 다니며 눈에 들어온 것들을 모았고 그 물건들 속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진짜 합리적인 소비란 무엇일까? 그는 말한다. ‘내가 쓴 돈만큼 내 마음이 충족되느냐’가 중요하다고. 유머가 있고, 색이 살아 있으며, 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물건들. 소소 소비 시대에 자신만의 소비 철학을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나를 움직이는 소비의 기준
Q. 반갑습니다. 요즘 어떤 일과 생각으로 하루를 채우고 있나요?
요즘은 정말 많은 생각 속에 살고 있어요. 영화 잡지에서 시작해 패션지, 온라인 뉴스 매체를 거쳤어요. 지금은 영화평론가라는 직함을 많이 쓰지만, 영화 평론은 제 작업의 일부예요. 정치, 문화, 사회 등 다양한 주제로 두루 글을 쓰다 보니 매일 뉴스, 소셜 미디어, 책을 계속 보게 돼요. 인풋이 멈추는 순간이 거의 없어요.
Q. 최근 《나의 충동구매 연대기》를 출간하셨죠. 왜 지금 이 시점에 충동과 소비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느꼈나요?
저는 물건 사 모으는 걸 좋아하고 집에 물건이 정말 많아요. 여러 매거진에 ‘무언가를 샀다.’로 시작하는 글을 많이 썼는데 출판사에서 묶어보자고 제안했어요. 절약이 일상이 된 시대에, 저는 ‘예쁘면 산다.’는 반대의 감각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또 하나는, 요즘 집들이 너무 비슷해졌다는 거예요. 인스타그램 속 집들이 비슷한 조명과 포스터로 복제되는 걸 보며 조금 너저분하더라도 내가 좋아서 고른 것들로 채운 공간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Q. '소소 소비'가 화두예요.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나에게 적합한지 판단해서 구매하는, 즉 덜 쓰되 더 잘 쓰자는 흐름인데요. 본인의 소비 방식과 비교하면 어떤 점이 비슷하고 다른가요?
저는 계획적으로 소비하지 않아요. 결국 물건을 살 때는 늘 그 순간의 직관이 작동하더라고요. 저는 그 충동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아요. 글도, 일도, 인생도 계획보다 직관으로 움직여왔고 결과적으로 그 길이 저한텐 맞았어요. 물건도 우연히 마음에 들어오면 사고요. 처음엔 무질서한가 싶었는데 나중엔 제가 고른 것들끼리 조화를 이루더라고요. 다만 충동이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뜻은 아니에요. 카드값에 치여 살면 안 되죠. 저한텐 지나친 계획보다 직관이 더 자연스럽고 길게 보면 오히려 절약되기도 했어요.
Q. 불황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무언가를 사고 싶어 해요. 그 이유가 무엇 이라고 생각하세요?
할리우드 영화의 전성기가 언제였는지 아세요? 바로 1차 세계대전 직전, 세계 대공황 때예요. 사람들이 밥 먹을 돈도 없는데 극장으로 몰려갔어요. 경제가 어렵고 세상 돌아가는 일들이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꿈꾸고 싶거든요. 저는 불황일수록 사람들이 ‘내 마음에 드는 무언가’를 원하고, 예쁘고 좋아 보이는 걸 사고 싶은 열망이 더 커진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런 시기엔 오히려 자기 삶 속에서 작은 즐거움을 찾는 소비가 더 절실해지는 것 같아요.

프랑스 편집숍에서 구입한 테리 리처드슨 한정판 피규어
Q.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물건을 선택해 왔는지 궁금해요.
거창한 원칙을 세워두지는 않았어요. 결국 제 눈에 들어오는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에요. 물건을 볼 때 ‘눈이 달린 오브제’를 보면 시선이 가요. 사람들은 “무당집 같다”, “귀신 든 것 같다”고 하지만, 저는 그게 재밌어요. 물건과 내가 마주 보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런데 의식적으로 ‘난 이런 걸 모아야지.’ 한 게 아니에요. 그냥 20년 동안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눈에 들어온 걸 모으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예요. 그리고 어느 순간 뒤돌아보니 제 취향이 만들어져 있더라고요. 저는 취향 개발이라는 표현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취향은 개발되는 게 아니라 살아오면서 쌓이는 거예요. 10년쯤 지나 살아온 집을 둘러보면 내가 산 물건들 속에서 어느새 나 자신이 보이는 거죠.
Q. 눈이 달린 오브제가 특히 흥미로워요. ‘눈’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눈이 달린 물건은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일본에는 새해에 복을 기원하며 마지막에 눈을 그려 넣는 행사도 있잖아요. 눈을 넣는 순간 영혼이 들어간다고 믿는 거죠. 저는 그게 생명력이라고 생각해요. 존재감이 느껴지는 물건들을 좋아하다 보니 이 집도 좀 시끄러워요. 모든 물건이 저를 바라보며 존재감을 주장하는 느낌인데, 그게 좋아요.
Q. '합리적 소비’라는 말은 사람마다 의미가 다를텐데, 어떤 소비를 합리적이라고 해석하는지 궁금해요.
저는 소비를 돈의 문제로만 보지 않아요. 진짜 합리적인 소비는 ‘내가 쓴 돈만큼 내 마음이 충족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당장 돈이 없어서 마음에 들지도 않는 가구를 저렴하게 사요. 그런데 결국 5년 뒤 그걸 버리고, 처음부터 갖고 싶었던 덴마크 빈티지 가구를 사게 돼요. 그러니까 중요한 건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사기 위해 얼마만큼의 시간과 돈을 들일 가치가 있는지 스스로 계산해 보는 거죠. 그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내 마음이 원하는 걸 사야 그게 진짜 합리적인 소비예요. 그래서 저한테 충동과 합리는 결국 같은 말이에요. ‘이건 내 거야.’라는 직감이죠.
Q. 최근 소비 중에서, ‘이건 내 기준에 딱 맞았다.’ 싶은 게 있었나요?
작년에 연희 아트페어에서 산 그림이에요. 성모 마리아를 살짝 패러디한 작품인데, 눈에 딱 들어왔어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작가님은 아니었고 가격도 40만 원 정도로 부담이 없었어요. 저는 원래 그림과 종교적인 소재를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진지한 성화라기보다 약간 유머가 있고, 성스러움을 살짝 비튼 느낌이 있어서 더 흥미로웠어요. 저를 놀리는 듯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이 있었거든요. 작가의 이름값보다는 취향에 맞는 그림이라서 더 좋더라고요.

연희 아트페어에서 구입한 동양풍 성모 마리아 작품
Q. 반대로 ‘이건 왜 샀을까?’ 싶었던 소비도 있나요?
일단 사고 나면, 그 물건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려고 해요.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걸 선택했을 당시엔 분명 내가 끌린 이유가 있으니까요. 얼마 전에 18년을 함께 산 고양이가 세상을 떠났어요. 너무 허전해서 그 아이를 닮은 인형을 샀죠. 다 큰 남자가 고양이 인형을 껴안고 자는 게 웃기긴 하지만 그만큼 절실했어요. 그러다 이내 알게 됐어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는 걸요. 혼자 살 땐 내가 고른 것들로만 집을 채우는 게 행복했는데 고양이와 살며 처음으로 ‘내 마음에 안 들어도 필요한 것들이 있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관계도 비슷하죠. 취향만으로는 완벽한 공간도, 완벽한 관계도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물건이 만드는 일상
Q. 공간이나 소장품을 보면 취향을 넘어선 어떤 시선이 느껴져요. 물건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건 무엇인가요?
저는 유머가 있는 물건을 좋아해요. 개성이 탁 튀어나오면서 사람을 웃게 만드는 것들이요. 글을 쓸 때도 조금 웃기게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고, 영화 행사나 강연을 할 때도 늘 ‘열 번은 웃기자’라는 생각을 해요. 웃음이 좋거든요. 내가 웃는 것도, 다른 사람이 웃는 것도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진지해서 블랙 유머나 장난기 있는 디자인을 불편해하는 편이죠. 그런데 영국에서 2년 정도 살면서 많이 느꼈어요. 영국 사람들은 대화에도, 책에도, 영화에도 늘 유머가 있어요. 억지로 웃기려는 게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에 유머가 있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깨달았어요. 유머는 결국 ‘삶을 버티게 하는 감각’이라는 걸요.
Q. 오래 쓰고 있는 물건 중에서 하나를 꼽는다면요? 그 물건이 오래 살아남은 이유가 단순히 기능이나 품질 때문만은 아닐 것 같아요.
기능이 완벽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디자인이 마음에 들면 그냥 계속 쓰는 편이예요. 예를 들면 발뮤다 공기청정기요. 성능은 조금 떨어지는데에 비해 가격은 비싼 편이죠. 그런데 집에 두었을 때 보기에 흉하지 않잖아요. 그 정도의 타협은 할 수 있어요. 기능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그리고 저는 아직도 마샬 줄 이어폰을 써요. 성능이 압도적인 건 아닌데 단점이 없고 예뻐서 좋아요. 무선 이어폰은 충전이 귀찮아서 못 쓰겠어요. 결국 기술이라는 건 저 같은 귀찮은 사람들을 위해 발전한다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꽂고만 있어도 자동 충전되는 무선 이어폰이 나오겠죠. 그게 나오면 바꿔볼 생각이에요.
Q. 일상에 맞춰 물건을 고르는 편인가요, 아니면 물건에 맞춰 일상을 조정하기도 하나요?
의외로 물건에 맞춰 일상을 바꾸는 편이에요. 지금도 헤이에서 산 빨간 의자에서 일해요. 예쁘지만 오래 앉긴 힘들죠. 요즘 다들 허먼 밀러를 쓰지만, 저는 오피스 분위기가 싫어서 집에는 못 들이겠더라고요. 그래서 빨간 의자 덕분에 30분 일하고 자주 쉬는 루틴이 생겼어요. 불편한 디자인이 오히려 생활 리듬을 만든 셈이죠. 맥북도 비슷해요. 호환성이 썩 좋지는 않아도 예쁘니까 계속 쓰게 돼요. 저는 기능보다 ‘보기 좋고 마음에 드는 것’을 더 우선하는 편이에요.
Q. 오랫동안 다양한 물건을 모으며, 스스로 자주 발견하는 소비 습관이나 반복되는 패턴이 있을까요?
무엇보다 색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옷은 주로 검정이나 회색처럼 단정하게 입지만 집 안의 물건은 달라요. 공간 안에서는 색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요즘 거리의 옷차림이나 자동차 색을 보면 다 비슷하잖아요. 그래서 집만큼은 선명한 색이 필요해요. 그런 색감이 시각적으로 저를 자극하고 살아 있게 만들어요. 거실에 있는 1970년대 카르텔의 오렌지색 플라스틱 테이블만 봐도 그래요. 작은 물건 하나가 공간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주죠. 그래서 저는 제 공간에서만큼은 색이 꼭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Q. ‘취향 소비’와 ‘합리 소비’가 부딪힌 적도 있나요? 혹은 두 방향이 하나로 이어졌다고 느낀 순간도 있는지 궁금해요.
결국 둘은 만나야 해요. 한쪽만 따르는 소비는 오래가지 않거든요. 저는 가누다 베개처럼 디자인은 아쉬워도 건강을 위해 선택하는 물건이 있는 반면, 아무리 유용해도 집의 미감과 어울리지 않으면 들이지 않아요. 기능과 취향 사이에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는 것, 그게 저만의 합리성이라고 생각해요.

Q. 요즘 세대는 소비를 통해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익숙한 듯 보여요. 직접 관찰한 그들만의 소비 방식이 있다면요?
확실히 개성은 훨씬 강해졌어요. 거리만 봐도 다양한 스타일의 사람들이 있죠. 그런데 동시에 그 개성이 어디선가 본 이미지의 반복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소셜 미디어 등장 이후 메가 트렌드는 사라지고, 대신 수많은 마이크로 트렌드가 생겼잖아요. 패션도, 음악도, 인테리어도 뒤섞이면서 시대를 구분해 주는 감각은 점점 흐려졌고요. 그 과정에서 동질성이 사라졌다고 느껴요. 예전엔 비슷한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커뮤니티를 이루었는데, 지금은 모두가 자기 취향의 세계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 있죠. 그래서 마이크로 팬덤이 중요해진 것 같아요. 저도 최근에는 뉴진스에 빠져서 팬이 됐어요(웃음). 그러다 보니 다른 그룹엔 자연스럽게 관심이 줄더라고요. 취향이 점점 좁아지고 하나의 세계에 몰입하게 되는 거죠. 좋아하는 감정과 배척하는 감정이 동시에 작동하는 시대. 자유롭지만, 동시에 조금 외로운 일이기도 하죠.
Q. 요즘은 많이 사기보다, 자기에게 맞는 물건을 고르려는 흐름이 뚜렷한 듯 보여요. 이런 소비 방식이 앞으로 우리의 문화나 라이프스타일에 어떤 변화를 만들 거라고 보나요?
흥미로운 질문이에요. 그런데 저는 한국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렇게 많이 사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아직 ‘나를 위해 사는 소비’가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아요. 많은 경우가 나 자신이 아니라, 남의 눈에 비칠 나를 위한 소비죠. 쇼핑 사이트 랭킹 상위권 브랜드들이 유독 잘 팔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봐요. 요즘 거리를 보면 검정 옷, 검정 신발, 비슷한 스웨트셔츠가 반복되잖아요. 어느 순간 거리의 색이 사라졌어요. 결국 중요한 건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기준으로 물건을 고르는 일이에요.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덜 사게 돼요. 만족스러운 것만 남으니까요. 유행 때문에 사고 버리는 소비가 아니라, 결국은 나를 알아가는 소비로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소크라테스가 말했듯, 핵심은 결국 “너 자신을 알라.”인 거죠.
Q. 소크라테스의 명언이 소비를 위한 명언이었네요(웃음). 그렇게 보면 소소 소비의 본질도 결국 자기 이해에 닿아 있는 셈인데, 정작 자기 취향을 정확히 아는 일이 제일 어렵지 않나요?
어느 순간부터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기준으로 물건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이 와요. 저는 그게 한 10년 넘게 걸린 것 같아요. 그때는 1년에 서너 번씩 외국 출장을 다니며, 갈 때마다 벼룩시장에서 마음에 드는 작은 오브제 하나를 샀어요. 그렇게 고른 물건들이 20년이 지난 지금 제 공간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걸 보며 깨달았죠. ‘아, 이게 나구나.’ 결국 취향은 시간이 알려줘요. 빠른 사람도, 조금 더 걸리는 사람도 있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눈치 보지 않는 소비에 도달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고 생각해요.
Q. 최근 장바구니에 담아놓았거나 눈여겨보고 있는 물건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그 물건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도요.
올림픽이나 엑스포 마스코트를 수집하는 편이라 예전 올림픽 마스코트도 몇 개 가지고 있어요. 그 시절 마스코트는 단순하지만 기억에 오래 남는 고전적인 디자인이 많았죠. 반면 요즘 디자인은 복잡하고 금방 사라지는 경우가 많고요. 그런 점에서 2025 오사카 엑스포의 공식 마스코트 피규어가 오랜만에 눈에 남았어요. 디자인이 정말 이상하거든요(웃음). 누가 봐도 《기생수》에 나올 것처럼 생겼고, 일반적인 귀여움이나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어요. 일본이 이런 디자인을 공식 마스코트로 채택했다는 게 인상 깊었어요. 우리나라였다면 쉽지 않았을 선택일텐데, 일본은 이런 비정상적인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유연함이 있잖아요. 저는 그 감수성이 참 부러워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스코트 피규어
Q. 마지막으로, 소비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지갑을 열기 전에 꼭 던져봐야 할 질문 하나를 제안 해준다면요?
저는 오히려 ‘이게 정말 필요한가?’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어요. 세상은 필요 없는 것들 사이에 의미가 끼어 있을 때 더 재밌거든요. 모든 소비가 목적 지향적이면 삶은 너무 건조해져요. 시간이 지나면 결국 알게 돼요. 내가 산 물건들 끝에 남는 건 기능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흔적’이라는 걸요. 어릴 때 집에는 마도로스였던 아버지가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기념품들이 가득했어요. 악어 박제, 상아 조각, 크고 작은 조명들. 이사하면서 대부분 사라졌지만요. 한국은 이사를 자주 하다 보니 집의 역사가 쌓이기 어렵죠. 그런데 영국에서 살 때는 달랐어요. 몇 세대가 이어 사는 집에 가면, 벽마다 가족사진과 오래된 물건들이 남아 있었고, 그 공간 안에 분명한 정체성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물건을 살 때 이렇게 묻게 돼요. ‘이 물건이 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가?’ 그게 소비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