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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헤맨 만큼 단단해지는 카피의 땅

이야기는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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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맨 만큼 단단해지는 카피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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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현 카피라이터

좋은 카피는 단번에 나오지 않는다. 수십 개의 문장을 쓰고 지우는 사이, 언젠가 쓸 수 있을 것 같아 버리지 못한 문장들이 쌓인다. 그 과정에서 작업자는 자신의 언어가 아닌 것을 빌려오기도 하고, 막힌 공간을 떠나 새로운 곳을 찾아가기도 한다. 아이디어는 고요한 자리에서 완성되기보다, 헤매는 동안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쓰고 버리고 다시 쌓는 일을 반복하며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가는 이노션 카피라이터 손수현을 만났다.


 

낯선 곳으로 헤매며 확장하는 발상

Q. 이노션에 합류하기 전에도 다양한 현장에서 커리어를 쌓아오셨어요. 지금의 ‘광고인 손수현’을 만든 그간의 궤적이 궁금해요.

사실 저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어요. 졸업 직전 마지막 학기에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져서 에디터 스쿨도 신청하고 문화센터에도 다니며, 매거진사에 지원해 보고 그랬거든요. 그림이랑 글을 같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찾고 있었는데, 마침 광고디자인 교수님이 카피 쪽도 잘 맞을 것 같다는 조언을 해주셨죠. 취업 준비는 조금 늦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때 헤매던 경험이 다 아이디어를 낼 때 단초가 되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헤맨 만큼 내 땅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처음엔 별로 와닿지 않았지만 요즘 조금씩 실감하고 있습니다.

Q. 이노션에서 일하는 방식은 어떤가요? 새 브랜드 과제가 주어지면 어떤 식으로 제작 프로세스가 진행되고, 그 안에서 카피라이터님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저희는 ‘풀(Pool)제’라고 해서 고정 팀 소속이 없어요. CD님들이 그때그때 유닛처럼 팀을 꾸리는 방식이라, 누구랑 하느냐에 따라 회의 형태도 달라지죠. 기본 흐름은 기획팀이 캠페인 목적을 정리해서 제작팀을 만나는 거고, 운이 좋으면 아이디어 낼 시간이 2주 정도 주어져요. 급할 때도 많지만요. 올해 ACD(CD를 준비하는 단계)가 되면서 역할이 달라졌어요. 아이디어 내는 시간보다 기획팀, 제작팀, 프로덕션 사이에서 조율하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거든요. 예전에 모시던 팀장님이 CD가 되시고는 “아이디어 낼 시간이 전보다 줄어든 것 같아 아쉽다”고 하셨는데, 이제 그 말이 실감 나요. 비율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부단히 찾아가는 중입니다.

Q. 예전엔 카피라이터는 카피만, 아트디렉터는 비주얼만 전담했다면, 지금은 다 같이 아이디어를 내고 이후에 업무를 세분화한다고 하셨잖아요. 처음 업계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카피라이터의 역할이 어떻게 달라진 것 같나요?

AI 활용도가 높아졌어요. 카피라이터도 생성형 AI로 그림을 구현해 볼 수 있게 됐고, 아트디렉터도 키워드를 뽑거나 콘셉트를 잡을 때 툴을 많이 쓰니까요. 카피에만 집중하다 보면 나중에 그림이 잘 안 붙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지금은 한 사람이 다 붙잡고 가니까 원안의 이해도가 높아져서 훨씬 단단한 콘티가 나오는 것 같아요. 직무의 경계가 많이 흐려졌다고 느낍니다.

Q. AI 이야기가 나온 김에 좀 더 여쭤보고 싶어요. 실제로 크리에이티브 환경이 바뀌는 걸 어떻게 체감하나요?

AI가 없는 시대에 ACD가 됐으면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요. 저를 잘 이해하는 막내 아트디렉터 한 명이 붙어 있는 느낌이거든요. ‘나 이런 카피 썼는데, 이런 그림으로 만들고 싶어.’라고 하면 같이 만들어주는 거죠. 아이디어를 설득할 때 그림이 같이 붙어 있으면 확실히 효과가 다르니까요. 가끔 AI가 좋은 키워드를 줄 때도 있는데, 아직 그대로 내보낼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에요. 영혼이 좀 없달까요. 아이디어 논의를 몇 번 하다 보면 전에 제가 한 이야기를 자기 것 마냥 다시 가져오기도 하고요. 결국 마음에 확 와닿게 만드는 건, 영원히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Q. 혹시 아이디어가 잘 풀리지 않을 때, 본인만의 돌파 방식이 있나요?

완전한 해결책은 없어요. 이 질문이 제일 어려웠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고요. 저는 일단 일이 막히면 공간을 계속 바꿔요. 사무실에서 안되면 회의실로, 회의실이 안되면 1층 카페로, 그래도 안되면 근처 다른 카페로 가죠. 커피값을 많이 썼어요. 그중에서도 층고 높은 카페가 제일 도움이 됐는데, 어느 건축가가 층고가 높은 곳에 있으면 생각이 알게 모르게 열리는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요즘은 러닝도 시도 중이에요. 막힐 때 잠깐 뛰고 와서 다시 하는 거죠. 아직 완성된 루틴은 아니지만요.

Q. ‘노담사피엔스’ 캠페인은 ‘금연’이라는 금지의 언어를 ‘새로운 종의 정체성’이라는 긍정의 언어로 뒤집어 주목받았습니다. 기존 문법을 뒤집는 역발상이 필요할 때, 아이디어를 확장하는 방식을 알려주세요.

저는 본래 순접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편안한 카피를 선호하죠. 그런데 ‘노담사피엔스’는 보건복지부가 워낙 광고를 많이 해왔기에 좀 다른 접근이 필요한 상황에서 제 성격과는 다른 카피를 써야 했던 것 같아요. 그럴 때는 이렇게 생각해요. ‘내 주변에서 가장 역발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지? 그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서 뭐라고 카피를 쓸까.’ 그 친구가 평소에 쓰던 워딩을 가져와 보기도 해요. 그러면 제 사고도 확장이 되는 것 같아요.

Q. 매번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야 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아, 이래서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구나.’ 하고 실감했던 순간이 있나요? 결과와는 별개로, 그 경험이 광고인으로서의 태도나 시선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도 궁금해요.

저를 포함한 동료들 중에 ‘도파민 중독자’가 유난히 많은 것 같아요(웃음). 매일 똑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숫자만 다루는 일은 하루도 못 할 것 같거든요. 과제가 계속 바뀌고, 타깃이 바뀌고, 저보다 훨씬 어린 세대의 문화를 계속 공부해야 한다는 점이 저를 멈춰 있지 않게 해줘요. 태도에 대해 말하자면, 정샘물 뷰티 캠페인이 전환점이 된 것 같아요. 과제가 ‘한 사람 한 사람 안에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거였는데, 그때 나온 카피가 “거울을 5초 이상 들여다본 적 있어?”였어요. 주니어 때는 신조어나 말장난 같은 기술적인 카피에 집중했는데, 그 프로젝트를 하면서 ‘아이디어의 시작점이 다르면, 굳이 기교를 부리거나 힘을 싣지 않아도 와닿는 카피를 쓸 수 있겠구나.’라는 확신을 얻은 것 같습니다.

Q. 정샘물 뷰티 캠페인 이후 반응도 궁금합니다. 캠페인이 세상에 나간 뒤, 가장 마음에 남았던 피드백은 무엇이었나요?

“작가님스러운 광고가 나온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예요. 과제마다 브랜드에 맞춰 내 결이 아닌 방향으로 써야 할 때가 종종 있는데, 그때는 평소 제가 편하게 쓰는 결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광고에서도 내 목소리가 나올 수 있겠다.’는 걸 처음 실감했죠. 저는 좀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편이라 제가 만든 광고가 나와도 먼저 알리는 편은 아닌데, 길 가다 전광판에서 그 광고가 크게 나왔을 때 가족한테 “저거 사실 내가 한 거야.”라고 처음 이야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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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 채집하며 버티는 문장

Q. 광고는 결국 여럿이 함께 만드는 결과물이잖아요. 다른 팀원들과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본인의 안을 설득하는 노하우가 궁금해요.

저는 아이디어를 제안할 때 첫 페이지를 일상 이야기로 시작해요. “주말에 길 가다 이런 거 본 적 있죠?” 같은 식으로 공감을 먼저 끌어내는 거예요. 어떤 분들은 광고주 브리프*에서 바로 시작하기도 하는데, 저는 일상에서 시작하는 게 더 편하더라고요. 타율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거 오늘 무조건 팔린다 싶었는데 하나도 안 팔릴 때도 있고, 맨 뒤에 참고용으로 넣어둔 안이 제일 좋다고 선택될 때도 있으니까요.

Q. 아끼던 안이 탈락했을 때는 어떤 마음인가요? 혹시 탈락한 안이 훗날 다른 캠페인에서 살아 돌아온 경험도 있나요?

‘못 알아보네.’ 이러고, 다음에 써야지 하고 넘기긴 해요(웃음). 사실 탈락한 안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조만간 될 거라고 생각하며 생각하며 잘 놔두다 보면, 어딘가에 붙여서 활용하게 될 때도 종종 있어요. 탈락한 게 아니라 아직 자기 프로젝트를 못 만난 것뿐이라고 믿는달까요. 왜 선택되지 않았는지 물어볼 때도 있어요. 그 이유를 알아야 다음에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브리프(Brief) : 프로젝트의 목표와 방향을 정의하는 클라이언트의 작업 지침

Q. 아이디어는 혼자 떠올리더라도, 캠페인은 결국 함께 완성되는 것 같습니다. 동료들과의 협업 과정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은 무엇인가요?

협업이 재밌어요. 다 같은 과제인데 다들 다른 걸 가져오잖아요. 그래서 요즘 버릇처럼 하려는 말이 “그럴 수 있겠네.”예요. 각자의 고민이 담긴 아이디어들이니까, 일단 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ACD로서 팀원들의 안을 정리할 때도 어떻게든 각자의 목소리가 한 줄이라도 들어가게 신경 쓰는 편이에요. 회의가 4, 5차까지 가다 보면 1차 때 그냥 넘긴 안을 다시 꺼내 보기도 하는데, ‘어, 이게 왜 안 보였지?’ 싶을 때가 꽤 있거든요. 각자의 생각이 어느 정도 합쳐져야 그 프로젝트에 대한 애정도 생기는 것 같고요.

Q. 콘텐츠를 매일 다루다 보면 일상에서도 무심코 크리에이터의 눈으로 상황을 분석하게 될 것 같아요. 길을 걷다가, 혹은 누군가의 말을 듣다가 ‘이건 뭔가 되겠다.’ 싶은 순간이 있나요?

띄어쓰기에 예민해요. 길을 가다 띄어쓰기가 틀린 간판을 보면 너무 답답하고, 메뉴판에 오자가 있으면 고쳐드리고 싶어지거든요. 직업병이죠. 그 와중에 아이디어 씨앗을 줍기도 해요. 식당에 붙어 있는 ‘효능 안내’ 같은 것들이요. ‘이 포맷을 어디에 응용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식이죠. 서점 가면 책 제목들도 메모장에 적어놔요. 좋은 카피랑 좋은 책 제목은 닮았거든요. 둘 다 사람을 사로잡기 위한 절실한 한 줄이니까요. 지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 방금 한 말이 꽤 근사한 거 같다 싶으면 꼭 다시 물어봐요. 기억해 뒀다가 써먹으려고!

Q. 그게 어떻게 보면 일을 완전히 놓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스스로 소진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비법이 있다면요?

스위치 끄는 법을 찾고 있는데, 아직 완전히 성공하진 못했어요. 저희는 카카오톡으로 업무를 많이 하다 보니 집중 모드를 설정해 두고 안 보려고 시도해 봤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요즘은 몸을 많이 움직이는 걸로 주의를 돌리려고 해요. 앉아서 머리를 계속 쓰다 보면, 뛰거나 손을 쓸 때만큼은 뇌가 좀 쉬는 것 같거든요. ‘생각을 끊어야지.’ 하고 의식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일을 연상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계속 시도 중입니다.

Q. 영감은 준비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경우가 더 많을 텐데요. 스치는 생각을 놓치지 않는 본인만의 기록법은 무엇인가요?

영화 대사나 인터뷰에서 좋은 문장을 보면 따로 아카이브 계정을 만들어서 모아둬요. 나중에 브랜드랑 잘 맞는 게 있을 때 꺼내 쓰려고요. 술자리나 커피 마실 때 좋은 말이 나오면 메모장에 아주 짧게라도 써놓고요. ‘오늘 누구를 만났는데 이 얘기가 되게 좋았다.’ 이 정도만 적어도, 나중에 그 말을 다시 살릴 수 있더라고요. 막힐 때는 그렇게 모아둔 걸 처음부터 다 다시 봐요. 스레드, 저장 콘텐츠, 메모 전부요. 피로하긴 한데, 그 안에서 뭔가 연결되는 순간이 생기거든요.

Q. 그러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 뭔가가 쌓이고 있겠네요. 그럼 가장 최근에 저장한 콘텐츠를 알려주세요.

오면서 보니 ‘관악산 김밥 맛집’이 있었어요. 관상가가 출연한 유튜브에서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관악산에 가라.”라는 멘트를 봤거든요. 그러고 나니 알고리즘이 그쪽으로 계속 뜨더라고요(웃음). 나중에 써먹을 용도로 저장한 건 ‘숨겨진 카피’예요. 요거트 뚜껑 껍질을 핥아 먹고 나면 그 안에 숨겨진 메시지가 나타나는 패키지 아이디어죠. 대놓고 카피를 보여주지 않는 방식이 필요한 프로젝트에 언젠가 꼭 써먹고 싶어서 저장해 뒀습니다.


 

Insight

나에게 영감을 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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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거나 깊이 자거나 최선을 다해 자는 게 하루 일과인 ‘하미’. 16년째 우리 집 일인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양이입니다. 잠든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성격 급한 제가 무장해제돼요. 특히 두 눈에 담긴 파랗고 노란 우주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제 안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무해한 것들로 가득 찹니다. 대부분 말랑말랑하고 동글동글한 생각들이죠. 바삐 흘러가는 일상에서도 영감은 그렇게 작은 틈을 타고 조용히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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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급할 때를 제외하고는 웬만해선 버스에 몸을 싣는 편입니다. 특히 파란색 641 버스가 꽤 기운이 좋아요. 기사님 바로 뒷자리나 가장 맨 끝자리는 은근히 쟁탈전이 벌어지는데, 무사히 자리를 잡고 나면 여기서만 샘솟는 생각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정류장마다 타고 내리는 사람들, 계절마다 다른 옷을 갈아입는 나무, 누군가가 고심해서 만들었을 간판까지. 메모해두고 싶은 문장이나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아이디어가 슬며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인지 목적지보다 그 순간을 더 기다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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