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치열하게 피운 새로움
리전드 필름 윤승림 디렉터
with 최원준 카피라이터
어디에서도 본 적 없고, 느껴본 적 없는 것. 새로움은 어디에서 나타나는 걸까. 그것은 정말 어디에도 없던 것일까? 뮤직비디오 ‘아마겟돈’으로 올해 가장 큰 주목을 받은 리전드필름 헤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윤승림 감독을 만나, 창의적 영역에서의 새로움이란 무엇인지 이야기 나누었다. 치밀한 준비와 노력, 오랜 경험과 불안을 딛고 선 새로운 시도가 쌓일 때, 비로소 갈고닦인 감각이 말해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윤승림이라는 새로움
원준 “창작자가 창작자에게 묻는다.” 이노션 아티스트 인터뷰. 뮤직비디오 신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안다면 꼭 들어봤을 이름, 리전드필름 윤승림 감독님을 만났습니다.
승림 안녕하세요, 리전드필름 헤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윤승림입니다.
원준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공감과 동시에 궁금했던 점이, 사전에 아주 치밀하게 준비하신다고요. 저는 영감을 얻거나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기 위해 레퍼런스를 많이 찾는 편인데요. 레퍼런스에 영향을 받으면 새로움이 사라지기도 하잖아요. 감독님만의 고유한 오리지널리티를 뽑아내는 비결이 있으실까요?
승림 광고와 마찬가지로 뮤직비디오도 클라이언트가 있고, 함께하는 스태프분들이 계시잖아요. 저는 레퍼런스가 설득을 위한 거라고 생각해요. 창작자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설명해 주는 용도로요. 짧은 기간 안에 하이 퀄리티를 뽑아야 하니 많은 레퍼런스를 찾죠. 오리지널리티는 시작점에 있는 스토리예요. 영화로 보면 시나리오고요. 뮤직비디오가 비주얼 시퀀스의 향연인 아트 같지만, 결국 이야기가 먼저 설계되어야만 레퍼런스를 창조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요.
원준 뮤직비디오에는 한 곡의 길이라는 압축된 시간 제약이 있어요. 수많은 아이디어 속에서 어떤 걸 선택하고 탈락시킬지 정하는 기준이 있나요?
승림 앞서 말한 ‘이야기'가 가이드라인이에요. 감각의 영역인 만큼, 그 이후에는 직관적으로 골라야 할 부분도 있어요. 그것도 결국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느냐가 답을 주는 거예요. 단단한 바탕을 딛고 선 거죠.
원준 셀렉을 하다 보면 누가 봐도 새롭다고 느낄 때가 있을 텐데요. 계획한 방향과 조금은 벗어나지만 새로운 임팩트를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밸런스를 맞추는 기준도 있을까요?
승림 스토리를 벗어나 이미지에 매몰되지 않도록 경계하려고 해요. 원준 님은 어떠세요? 광고도 비슷한 고민이 있을 것 같아요.
원준 카피라이터에겐 크리에이터 디렉터가 계시긴 한데요. 저는 최대한 새로운 것에서 출발해서 가져오려고 해요. 설득력이 충분하다면 아이디어가 뽑히겠죠.
승림 마찬가지예요. ‘새로운 시도가 되겠다’ 싶은 선택을 어떻게든 찾아내려 해요. 저는 후반 작업을 많이 하는 편인데, 디자이너들이랑 작업 과정이나 프리뷰도 함께 뜯어 보곤 해요. 친구들이 생각지도 못한 멋진 걸 보내주면 그걸 버릴 순 없잖아요. 그러면 아이디어를 어떻게 함께 녹여낼까 맞춰가는 거죠. 그렇게 디벨롭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원준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변수인 거죠.
승림 뮤직비디오 프리라이팅 리허설이 엄청 쫀쫀하고 완벽하게 되기 힘든 환경이다 보니 실제로 그걸 구현했을 때 내가 생각한 거랑 다른 룩이 나올 때가 많은데, 그때 쾌감도 커요. 원하던 것과 달라서 오히려 좋을 수 있는 건데, 그런 것들을 빠르게 캐치하고 취하는 게 제 강점 같아요.
원준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걸 컨트롤하려 하기보다 큰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변수를 이용하는 거죠.
승림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가 되었으니까, 그 안에서의 변수를 매력적으로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원준 한편으로는 새로움이라는 게 창작자한테는 지긋지긋한 화두라는 생각도 들어요. 매력적이지만 낯설고 난해한 것이기도 하고요. 감독님은 새로움에 어떻게 접근하시나요?
승림 원준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원준 음, 저는 ‘새로움’ 자체는 날것 그대로인데,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사랑할 만한 걸’ 찾아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연결해 낸다면 크리에이티브를 잘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승림 새로움은 괴로운 거죠. 매번 그렇게 하기 힘들잖아요. 결국 이것도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 같아요. 친숙하고 이해하기 쉬운 두 줄의 이야기를 새롭게 연출할 때 비로소 새로이 보이는 게 있어요. 사람들에게 쾌감을 주고요. 오랜 경험이 쌓이고 나니, 반짝 떠오르는 게 아니라 데이터가 축적되고 내공이 쌓여야 그 안에서 새로운 걸 만드는 법을 알게 되는 것 같고요.
원준 세상에 새로운 게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승림 저는 모든 게 다 에디팅이라고 생각해요. 완전히 새로운 것은 거의 없고, 그것을 찾으려던 저는 오만했어요. 지금은 에디팅이라는 행위가 창의적이라고 느껴요. 똑같은 소스도 어떻게 쓸지 아는 것이요.
원준 에디팅을 통해서 보편성, 클리셰를 비틀어낼 수도 있겠네요.
승림 제 나름의 비틀기 도전이라면 ‘바로 떠오르는 걸 하지 않기’예요. 유행이 있잖아요. 누가 봐도 요즘 인기 있고 좋아 보이는 것, 그런 식으로 예전에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여기던 걸 꺾어보는 거죠. 좋아한다고 생각하던 것도 곧 지겨워지니까요.
윤승림이라는 시너지
원준 올해 공개된 에스파의 ‘아마겟돈’은 굉장한 비주얼 쇼크였어요. 돈 내고 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으니까요. 감독님 SNS에서 과감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달라는 클라이언트의 말에 심장이 뛰었다고 쓰신 걸 보고, 이 일에 어떤 태도로 임하고 계신지 느껴지더라고요. 하지만 이런 반응과 기대가 부담이 되지는 않나요?
승림 설레는데, 좌절감도 있는 것 같아요. 제가 20대에 ‘입봉’을 했어요. 일찍 메이저로 들어오고 달려왔는데, 20대에 비해서 내 감각이 무뎌지진 않았나 두렵기도 했고요. 재작년엔 살면서 이렇게 긴 터널을 가본 적 있을까 싶을 정도의 무기력과 우울이 찾아오더라고요. 정말 미친듯이 일만 해왔는데, 13년 동안 삶에 일밖에 없었으니 감독으로서는 성장을 했지만 인간으로서는 성장을 멈춘 느낌이 저를 힘들게 했나 봐요. 돌아보면 큰 변곡점이었고, 생각이 달라지는 계기가 됐죠.
원준 일을 대하는 태도나 삶의 방식에 있어서도 많이 달라졌겠네요.
승림 이왕 힘든 거 재밌기라도 하자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나랑 얘기가 통하는 디자이너랑 스태프와 일하고 싶더라고요. 상업 예술이긴 하지만, 머니잡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소명감 있는 사람들이랑 함께하려고 해요. 그럴 때 정말 즐길 수 있고요. 그 외에는 일상을 만들기 시작했죠. 매일 강아지 산책하고, 루틴을 만들어 가는 거요. 아직 부족하지만요. 일상이라는 삶의 원동력이 필요하더라고요.
원준 말처럼 소명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면 정말 힘이 날 것 같아요. 그렇다면 커뮤니케이션이 공동 작업에서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3~4분 내외의 영상이지만 정말 많은 사람이 참여해요. 모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조율하려고 노력하신다고 들었어요.
승림 스태프 리스트를 짤 때 그분들이 제일 잘하는 게 뭔지 생각해요. 어떤 사람은 디렉션이 명확한 걸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크리에이터로서 자유도를 줘야 해요. 성향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데, 제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건 아웃풋의 완성도를 높이는 거예요. 이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합당한 보수나 합리적인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건 당연한 거고, 고생한 보람이 있는 하이 퀄리티의 작업물을 내야죠.
원준 최근에는 퓨추라캔버스에서 대중예술과 AI에 대한 강연을 하셨어요. 다양한 분야를 아는 것이 작업 전반의 관여도를 높여줄 것 같은데요. 감독님의 작업에서 새로운 기술이 어떻게 시너지를 내왔는지 궁금해요.
승림 신기술이 다가오는 걸 눈 감고 외면할 수는 없잖아요. 물론 잘 모르는 분야이기 때문에 해당 분야 디자이너분들의 역할이 정말 크고, 그때 작업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 같아요. 제가 새로운 기술에 열려 있어야, 새로운 작업과 이미지에도 열려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20대 촬영 감독님들은 크로마키에 두려움이 없어요. 저는 이게 될까 싶었는데, 하다 보니 되더라고요. 퓨추라캔버스에서 젊은 작가님들 명함을 많이 받았어요. 실제로 함께 작업도 하게 됐고요. 그렇게 넓어지고 있어요.
원준 작업에서 기술의 발전이 주는 자유도가 높다 보니 새로운 영역에 더 관심을 가지시는 것 같아요.
승림 도구적 유용함 때문인 이유가 크죠. 한번은 AI가 디렉터까지 하면 어떡하냐는 질문을 받았어요. 하지만 저는 AI가 대체 못 하는 영역이 제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티스트를 대하고 끌고 나가야 하는 작업은 기획만으로 해낼 수 있는 게 아니고, 오히려 기획을 짜거나 콘셉트 아트에서 AI를 활용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결국 거기에 또 디렉션을 주는 거거든요. 새로운 것과 새로운 것을 결합한 하이 컨셉 비주얼이 존재할 뿐이지, 그걸 콘셉트로 만들고 스토리로 엮는 건 제 영역이니까요.
원준 공감해요. 카피라이팅에서도 현재 AI 수준에서 카피 한 줄을 뽑아내려고 한다면 결국 기획과 콘셉트는 그 도구를 쓰는 사람이 먼저 학습시켜야 하고, 또 어떤 명령어를 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니까요. 사용자가 누구냐가 중요한 기술인 거죠.
승림 결국 저희가 판단해야 하고, 신뢰를 담보해야 하는 일 같아요.
윤승림이라는 세계
원준 감독님만의 스타일이 있어서 사람들이 계속 리전드필름을 찾는다고 생각해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감독님에게 어떤 시간이 있었을지 궁금해요. 이건 내 영역이다 말할 수 있게 된 순간이 있으셨나요?
승림 아직 그런 순간은 안 온 것 같아요. 제가 잘하는 분야가 뭔지는 아는 것 같은데, 제 작업은 스펙트럼이 너무 다양해요. 아티스틱하고 심오한 작업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예쁘고 아름다운 것도 좋아하고, B급 감성도 충만해요. 엄청나게 획기적으로 신선하거나 색다르지 못할지언정 최대한 제가 안 해본 것들을 해보려고 매 작업 노력하고 있고요.
원준 진부하거나 뻔한 걸 좀 질색하시는 것 같아요.
승림 가끔 딜레마예요. 전형적이고 통상적인 것들이 쾌감으로 다가오고 감동일 때가 있는데, 그걸 간과하는 순간도 있을 것 같아서요. 새로운 걸 좇다 보면 로우 퀄리티처럼 보이는 작업이 나올 수도 있고, 설득이나 인지가 되는 장면도 필요한데, 그것에 제가 너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원준 그렇다면 조금 비틀어서, 클라이언트가 없는 비상업적인 작업을 하셨어요. 연간 윤승림 첫 프로젝트 위댐보이즈 작업에서는 기존 주어진 일을 하는 것과 다른 점이 있었을까요?
승림 오히려 뻔한 걸 했어요. 상업 작업이라면 뻔한 걸 피해서 새로운 걸 보여주려 했을 텐데, 여기서는 뻔한 환경이나 플레이 속에서 내가 얼마나 잘하는지, 내공을 보여주려고 한 거죠. 사실 춤이 좋아서 이 일을 시작했는데요. 스스로 안무 연출에 강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댄스로만 구성된 영상을 만들어 본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기회가 생긴 거예요. 위댐보이즈도 적극적으로, 실시간 피드백을 하면서 안무를 구성하고요. 꼭 재즈의 잼을 하는 것 같았어요.
원준 누가 먼저 시작이 아니라 서로 계속 영향을 주고받은 거네요. 저도 영상 재밌게 봤어요. 익숙한 공간의 재구성이랄까요.
승림 그렇죠. 일단 큰 틀을 제가 잡은 뒤에 많은 티키타카가 있었어요. 모두가 진심으로 아이디어를 내고요. 머릿속에 있는 걸 그대로 구현하면 되는 작업이었고, 정말 좋았어요. 뮤직비디오가 나오면 보통 아티스트나 소속사를 칭찬하는 반응이 많은데, 이번에는 감독에 대한 댓글이 엄청 많더라고요. “잘 만든 사람이 한 것 같다.” 이 말이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원준 정말 치밀한 준비와 작업 과정이 바탕이 되어야 앞서 말하신 즉흥성이나 새로움이 나온다는 생각이 들어요. 13년 차, 타인에게 영감이 되는 감독님에게도 지치는 순간이나 휴식이 필요한 순간도 많았을 텐데, 긴 시간을 이끌어온 동력이나 영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승림 사실 일이 많고 잠을 못 자거나 하는 순간에는 힘들긴 해도 걱정이 안 돼요. 오히려 모든 게 끝났을 때가 제일 걱정이죠. 소위 번아웃이라고 하는데, 사실 달리다 멈췄을 때의 불안감 같아요. 지금은 그 불안보다 설렘이 더 크다는 걸 알아요. 저는 경쟁을 정말 싫어하거든요. 지고 싶지가 않은데, 항상 레퍼런스를 보면서 타인 그리고 나 자신과 비교해야 해요. 그 순간이 제일 괴롭죠. 하지만 저는 타고난 승부욕이 있으니까, 언젠가 이것보다 잘해야지, 하는 마음이 제가 얻는 영감 같아요.
원준 그 설렘은 대체 언제 시작된 걸까요.
승림 이건 기억나요. 초등학교 때 디베이스 노래랑 이효리 님 ‘헤이 걸’ 뮤직비디오를 보고 “저거 하고 싶다.” 그랬어요. 저게 뭔지도 모르는데 말이에요. 저는 목표가 있으면 설렘이라는 단어처럼 로맨틱하고 되게 좋겠다, 이런 정도가 아니라, 먹던 사탕을 뺏긴 것처럼 무조건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거든요. 그래서 불안과 성숙의 시간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원준 어떤 설렘을 제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자신을 알아가는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독님 인터뷰를 읽는 분들도 저처럼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